어바웃 시리즈 2
| 너는 너야?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첫째로 어이가 털릴 것이다.
나니까 나지 —> 어제의 너는 너야? 24시간 전하고 큰 차이는 없으니까 나지 —> 1년 전의 너는 너야? —> 10년 전의 너는 너야?
| 여기서부터 살짝씩 균열이 발생한다. 어제의 나는 뭐 비슷한 것 같은데 — 5년 전 / 10년 전 그리고 그 이전의 나를 나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저런 흑역사를 만들어 냈던 내가 과연 나라고? 싶을 때가 존재할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너무 달라진 모습에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섦을 느낄 수도 있다.
피천득은 ‘인연‘에서 아사코와 가진 세 번의 만남을 떠올린다. 세 번째로 많이 달라진 서로의 모습을 통해 ’그날 아침 나는 그 집을 나서면서 악수를 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수필 말미에는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말을 남긴다. 오히려 아사코와의 만남이 그녀와 가졌던 추억을 바래게 했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수필은 아니지만, 어쨌든 시간과 상황이 변하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서 연속적으로 정의하는 것인가?
| 교환학생에 와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을 생각보다 열심히 듣고 있는데….. 그 중 self and identity라는 수업이 있다. 사실 여기서 처음 정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매 순간 바뀐다. 이전과 동일한 ‘나’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과 사멸을 반복하며 변화한다. 철학적으로도 매 순간의 나는 동일할 수 없다. 동일하다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시간/장소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애초에 이런 상황은 성립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왜 한 인간을 여전히 ’그 인간’으로 여기는가 하면
| 어떤 이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잡히고 난 후에 하는 말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나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라고 주장한다. 오~ 생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풀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의 행정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이런 정체성의 연속이 성립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선 인정한다.
| 그러면서 교수님은 하나의 사례를 설명해 주셨다. a와 b의 사례 — a의 뇌를 꺼내어 완벽하게 b의 몸에 넣고, b의 뇌를 꺼내어 완벽하게 a의 몸에 넣는다. 이제 a는 누구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a의 뇌가 들어 있는 b의 몸의 그것을 a라고 말할 것이다. 단순히 육체가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서 정의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으로서의 데이터를 쌓아 온 뇌 그리고 의식적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해 ’나‘의 개념을 종종 부여하곤 한다.
| 아무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 자신을 여전히 자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연속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단적인 예시로는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2년 전의 나를 떠올려 보면 지금과는 생각도 취향도 많이 달랐다. 이전으로 가면 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여전히 나로서 기능하는지 생각하다가 —>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색이 우리 존재의 일관성을 정의하지 않을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스펙트럼은 일종의 무지개와 유사하다. 멀리서 볼 때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색깔들은 분철되어 있지 않다. 교묘하게 색들은 연결되면서도 변화하고 —> 궁극적으로는 다른 색을 만들어 낸다. 빨간색도 무지개의 색이지만 빨간색과 완전 대척점에 있는 보라색도 빨간색과 마찬가지로 무지개의 색이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며 색의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고 이것들이 지속되면 지금의 그것과는 또 다른 색깔을 띠게 될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고 다른 색을 띠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두 지점만 본다면 단적으로 색이 분절되었다고 느낄 수 있으나 그 과정을 본다면 그 색들은 모두 미묘하게 이어져 있다. 모든 게 같다는 피상적인 의미의 일관성은 성립하지 않지만 그 과정을 겪은 하나의 주체로서 그 경험의 본질은 이어져 있기에 이 측면에서의 일관성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 ‘서울은 여전히 서울이고 나는 여전히 나야. 너는 여전히 너야?’라는 문장을 봤는데 —> 이것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상황은 언제나 변하기에 여전히 모든 게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그 본질에서는 여전히 연속성에서 비롯된 일관성을 띨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본질은 뭐임? 본질도 오래오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질문에 도달했는데 이건 해결하지 못했다….
| 무튼 스펙트럼에 대해서 생각하다 <우리가 및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라는 책을 떠올렸다. 이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인데, 간단히 말하면 조난당한 비행사 희진과 외계 생명체 루이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루이는 주기적으로 외형이 바뀌지만 여전히 루이이다. 이 외계인들은 색채어를 사용하는데, 이들은 혼란 속에서 헤어진 후 희진은 평생을 이 색채어 독해에 매달렸다. 결국 희진이 알아 낸 루이의 말들 —> 루이는 희진에 대해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인생으로 하나의 스펙트럼을 그리고 하나의 색채어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으로 개개인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연속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각 시기의 색깔은 서로 다르고 그 색깔의 변화는 때로 급격하게 때로 완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나 우리의 색은 필연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우선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앞서 말한 피천득의 ‘인연’에서 피천득은 과거의 추억과는 달라진 아사코와의 관계에 대해서 씁쓸함을 표한다. 사람들도 한 번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과거에는 쉴 새 없이 떠들고 누구보다 즐거웠던 추억을 공유한 사람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변해 버린 듯한 어색한 느낌
내가 변한 건가:: 저 사람이 변한 건가:: 이제 그때의 나/너는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그냥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한다면 운이 좋게 케미가 좋았던 색깔의 타이밍에 서로를 만나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거고 이제는 그때만큼은 아니나 여전히 그 사람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 사람이 그릴 스펙트럼을 응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요??
|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 연속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꼬꼬무로 나만의 얼렁뚱땅 답을 내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 특히 정체성과 본질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너무 어려움
| 어쨌든 저는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앙 ~~~~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