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살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반복해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익숙해서 적응하기 쉬울까, 이미 알고 있어서 두려울까. 내 경우는 둘 다 였다. 정신은 불안하면서 신체는 어느새 서투르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를 또다시 오다니, 말도 안 돼’ 속으로 외쳐보지만 휠체어에 몸을 기대 움직일 수 없었다. 혼자서는 절대 열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단단하고 무거운 철문이 나에게만큼은 수월하게 열렸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원 안내를 하는 간호사 말에 귀를 기울였다.
81병동에 처음 간건 2016년 봄이었다. 결혼식을 3주 앞두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결혼 준비와 다니던 회사 스트레스로 심각한 조울증이 발병했다. 응급실을 거쳐 교수님 면담 후 입원이 결정됐다. 삼 일 동안 겨우 한 시간 정도 잠을 자던 나는 매우 쉬고 싶었고 지쳐있었다.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얼마나 자고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피곤했다. 약 기운에 몽롱하고 어지럽고 시야가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희미하게 교수님이 보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 진정실이었다. ‘정신병동 입원이라니’ 내 삶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왜 이런 곳에 나를 가두는지, 내가 무슨 몹쓸 병에 걸렸는지, 병식(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간호사 말에 하나하나 반박하며 종이를 찢어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정서가 몹시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조울증 치료에 약물은 필수다. 폐쇄병동에 입원하면서 외부 자극이 없어 치료는 꽤 효과가 있었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니 들뜨고 날뛰던 기분이 조금은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일정 시간에 맞춰 주치의, 사회복지사와 함께 상담도 진행했다. 오늘 기분은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진정이 되니 비로소 내가 처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고 여전히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폐쇄병동 안을 잘 살피고 나를 이곳에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여기는 ‘폐쇄’라는 말 그대로 단절되어 있고 제한적인 것이 많다. 병동 밖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던 제품들은 금지물품이라는 이름 하에 철저하게 검사를 거친다. 휴대폰도 물론 사용할 수 없다. 사고 예방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만 샤워를 하고 단독으로는 할 수 없다. 약도 혼자 먹지 않고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만 골똘했던 것 같다. 치료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며 지루한 시간을 버텼다.
입원을 통해 병은 확실히 호전됐지만 평생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원한 것도 아니고 어느 누가 강제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할까. 그것도 홀몸이 아닌 임산부의 몸으로 말이다. 내 생애 두 번째 정신병동 입원을 하게 됐다. 5년 전과 달리 폐쇄병동은 보호병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왠지 답답하고 한숨 나오는 갑갑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교수님의 배려로 임산부인 나는 특혜를 받았다. 입원하는 동안 보호자인 남편과 같이 병실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나에게 안정을 취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태교여행을 정신과 보호병동으로 왔다고 여길 정도로 병이 나아지고 있었다. 내 병을 이해해 주는,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정신질환을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덕분에 남편과 이런저런 대화도 적잖이 나눴다. 병동 안에 긴 복도를 걷고 또 걸으며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화장실에 딸린 조그마한 공간에서 배부른 몸으로 샤워를 하고 불편한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했다. 하루하루 재미없는 무료한 날들이었지만 오직 뱃속에 아이만을 떠올리며 견뎠다.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산부인과 입원실에서 남편이 더 빨리 전화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응급실에서 좀 더 빠르게 정신과 진료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호텔에 가지 않았더라면. 119 구급 대원과 경찰이 올 정도로 흥분하지 않았더라면. 추석 연휴가 아니어서 교수님을 바로 만났더라면. 입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나는 분명 가족들에게 SOS를 많이 보냈던 것 같은데 타이밍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나만의 억울함이 문득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했다. 입원을 하고 교수님을 뵈었을 때 화나고 원통한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흘러 눈물로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큰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길을 잃어버렸다가 드디어 엄마를 찾게 되어 안심하는 어린아이인 듯 했다. 시간을 돌려도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과거를 탓하고 후회하기보다 5년 전 처음 입원했을 때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편이 낫다. 의료진과 가족들에게 의지하며 애써 괜찮으려고 내가 나를 어루만져 줬다. 입원해 있는 동안 산부인과 협진으로 짜꿍이의 안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질환자는 본인이 가장 힘들지만 지켜보는 가족들도 버금가는 고통을 받는다. 조울증에서 조증 상태 증상은 환자마다 다르다. 나는 극한의 조증일 때 망상과 약간의 환청을 겪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끼어 들어온다. 원래 말하려고 했던 말에서 자꾸만 벗어난다. 상대방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상하다고 의심하게 된다. 나만 굉장히 논리적이라고 착각한다. 현실에서는 절대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조금 더 병이 깊어져 망상에 이르게 되면 이유 없는 폭력적인 성향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을 욕설을 내뱉고 앞에 있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여기서 가족들은 혼란스럽다. 환자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혼동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환자가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속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저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이며 단지 아픈 조울증 환자의 면모일 뿐이다.
한 달간의 입원을 계획했지만 열흘 만에 퇴원했다. 급성 조증은 어느 정도 나아졌고 무엇보다 내가 입원 생활에 따분함을 느꼈다. 초조하고 예민한 마음은 계속됐다. 앞으로 출산까지 두 달여 남짓이 남았다. 더 이상의 이벤트는 생기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