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근직이라면서요..?!
나의 업무는 비영리 NGO인 우리 단체의 홈페이지와 온라인 기부 플랫폼에 올라갈 모금 페이지를 기획, 디자인, 관리하는 것이다. 즉, 모니터가 놓인 책상에서 벗어날 일이 거의 없는 사무직이다.
지난 3월 21일 경북 지역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날이 갈수록 산불로 인한 피해 규모가 커질 무렵 팀장님이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일 산불 취재 가능하신가요?"
지진이든 태풍이든 긴급구호가 터지면 내가 속한 온라인 모금팀은 신속하게 온라인 페이지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 뉴스 정보를 기반으로 온라인 모금함을 기획하고, 진행되는 긴급구호 지원 소식을 기부자들에게 빠르게 알려야 한다. 그런 온라인팀에서 긴급구호 현장에 직접 나간다니. 낯설고 기대되는 한편 떨렸다.
새벽 6시에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한 차로 회사에서 출발했다. 의성까지 4시간 이상 족히 걸리는 길이었다. 3분의 2 지점을 넘어 문경을 지날 즈음부터 먼 산이 안개가 낀 듯 희미하게 보였고 조금씩 자동차 실내 공기가 탁해졌다. 집에서 들고 나온 KF94 마스크가 한없이 얇고 부실하게 느껴졌다.
'공업용 마스크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의성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피해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면 멀쩡한 마을이 조금만 들어가 보면 전쟁터처럼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농가의 경우 집에 두었던 가스통이 터지면서 피해가 더 크다고 했다. 1km 거리의 산 사이로 불덩어리가 날아다니면서 떨어지다 보니 트럭과 창고까지 홀랑 탄 집이 있는가 하면 대문 앞 꽃나무까지 멀쩡한 집도 있었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슬래브 지붕 사이로 나무 탄 냄새와 차바퀴나 기계가 녹을 때의 유독한 냄새가 섞여 나왔다. 우리는 의성과 청송을 둘러보면서 현장을 촬영하고 마을에 돌아와 계신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지원이 필요한 물품을 파악했다. 서너 시간쯤 지나자 동료 한 명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나도 가슴 위쪽이 아파왔다. 그때까지 배고픈 줄도 몰랐던 우리는 서울로 출발한 뒤 3시가 넘어서야 첫 끼를 먹었다. 그사이 사진을 전송받은 서울 사무실에선 긴급구호 페이지를 오픈했다. 해가 떨어질 즈음 집에 도착하니 미세 먼지 가득한 서울 공기가 어찌나 반갑던지. 더 이상 가슴도 아프지 않았다.
나이 칠십 평생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르신들은 과거를 잃었고 대출 껴서 농기계를 구입한 어르신들은 미래까지 잃었다.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던 마을회관이 잿더미가 됐고 일제강점기에도 꿋꿋하게 버텨냈던 교회가 사라졌다. 그날 밤 어서 비라도 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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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난 지 두 달이 지난 5월 26일, 그동안 모인 기부금으로 지원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의성으로 향했다. 산자락 곳곳에 불이 붙었던 나무들은 여전히 시커멓게 남아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싹이 나고 잎이 자라서 녹음이 무성했다. 시커멓게 그을렸던 논밭도 새 비닐하우스와 무릎 높이만큼 자란 초록빛 마늘 줄기로 가득했다. 대피소나 자녀 집에 가 계셨던 어르신들도 거의 돌아오신 듯했다. 전소된 집들은 정리되어 깨끗한 빈 터가 되어 있었다. 대신 깨끗한 8평짜리 임시 주택이 서너 채씩 옹기종기 자리 잡았다. 나는 언제 산불이 났었냐는 듯이 바뀐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임시 주택을 반납해야 하는 2년 안에 살 집을 장만해야 하고, 복숭아와 자두 등 과실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기까지 5년은 기다려야 한다. 여전히 헬기 소리가 맴도는 것 같다는 분, 모든 의욕을 잃고 농사조차 포기하신 분 등 마음의 상처는 여전했다. 이번 여름 산사태로 인한 2차 피해의 위험도 있다. 집의 잔해는 치워졌지만 교회는 그을리고 휘어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자연도, 사람도 어떻게든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불 탄 예배당 대신 사택에서 예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동안 '생명력'이라는 단어를 만날 때마다 가슴 벅착던 이 날이 기억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