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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Aug 15. 2022

9년의 인내, 임지열의 시간은 지금부터

[지난주 히어로즈] 08.10 ~ 08.14

※ 키움 히어로즈 2014년 신인 지명자 칼럼 시리즈

히어로 임병욱, 누구보다 빛나는 너잖아

잊혀진 황태자는 아직 10승 투수를 꿈꾼다


키움 히어로즈의 외야수 임지열(27)이 지난 13일 대전 한화전에서 개인 통산 첫 홈런을 신고했다. 데뷔 9년 차, 1군 40경기 79타석 만에 쏘아 올린 마수걸이 홈런이다. 차세대 거포로 기대받으며 프로에 입문했지만 무수한 불운 속에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물론 그 모든 일이 있었기에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내는 '단단한' 홈런 타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2013년 일본 가고시마 마무리 훈련에 참가한 고졸 신인 4인방. 왼쪽부터 차례로 임병욱, 이용하, 임지열, 김하성.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고등학생 시절의 임지열은 이장석 전 넥센 히어로즈 대표이사가 김하성보다 높은 평가를 내릴 정도의 거포 유망주였다. 정수근이용규, 민병헌 등의 KBO리그 레전드를 배출한 덕수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주장 겸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2년 연속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야탑고등학교 야구부와의 청룡기 결승전에서는 쐐기 만루홈런이 비디오 판독 끝에 파울로 선언되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바로 싹쓸이 3루타를 치기도 했다.

 

신인 드래프트 당시 김하성과 임지열을 염두에 뒀던 이장석 전 대표이사는 2라운드를 앞두고 둘의 가치를 저울질한 끝에 임지열의 이름을 먼저 호명했다. 염경엽 전 감독은 신인 드래프트에 대한 감상을 묻자 만족스런 미소를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포스트 강정호' 임병욱(1차 지명), '야탑고 정근우' 김하성(2차 3라운드)과 함께 히어로즈의 차세대 주전 내야수가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9년 전 임지열에 대한 기대치는 그랬다.


하지만 막상 버건디 유니폼을 입고 나서는 전혀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며 잊혀진 선수가 됐다. 당시 넥센의 3루에는 매년 2할 중후반의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20대 중반의 '국가대표 내야수' 김민성,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며 두자릿수 홈런을 쳐본 '두산 베어스 4번 타자 출신' 윤석민이 버티고 있었다. 고졸 신인이 2년간 2할 8푼 9리의 타율과 8할이 넘는 OPS(On base Slugging, 출루율+장타율), 15홈런 88타점으로 활약해도 오목교역으로 가는 길이 열릴 리 없었다.


그사이에 드래프트 동기들은 하나둘 1군 무대에 올랐다. 가장 먼저 1군 경기에 출전한 하영민(2차 1라운드)은 데뷔전에서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한국프로야구 역대 6번째 데뷔 선발승, 역대 5번째 고졸 신인 데뷔전 선발승 기록을 챙겼다. 같은 해에 백업 요원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린 김하성은 이듬해부터 KBO리그 최고의 유격수가 되었다. 임병욱은 부상과 부진으로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꾸준히 기회를 받았다. 구자형(2차 4라운드), 김윤환(2차 10라운드)도 차례로 1군 마운드를 밟았다.


한편 임지열은 넥센의 홈구장이 목동 야구장에서 고척 스카이돔으로 바뀌고, 2016년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소당한 이장석 전 대표가 오랜 재판 끝에 징역형을 확정 받고, 2017년에 데뷔한 이정후가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동안에도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기약 없는 2군 생활은 선수의 정신을 잡아먹는다. 임지열과 함께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았던 임지섭(LG, 1차 지명)은 2019시즌이 끝난 뒤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며 구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했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처음에는 (1군에 먼저 올라간 동기들이) 부럽고 질투나기도 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제 야구를 열심히 하면 언젠가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부터 부러워할 시간도 아까웠다" - [고유라의 도란도란] '대기만성' 꿈꾸는 거포 기대주, 넥센 임동휘

임지열은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 멀리 앞서가 버린 동기들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개명도 하고, 포지션도 바꿨다. 심지어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가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아픈 내색 하나 안 했다.


2016년 겨울에는 할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을 버렸다. 김하성이 2년 차 풀타임 주전 유격수로 뛰며 20-20 클럽에 가입하고 임병욱이 주전 중견수로 자리 잡은 해였다. '임동휘'를 버리고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러 떠난 임지열은 2년간 3할 5푼 9리의 타율과 28홈런로 대폭발했다. 그러나 전역 직후 사생활 문제로 3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으며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징계를 마친 뒤 6년 만에 1군 무대에 올랐지만, 불안한 수비로 인해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9시즌이 끝난 뒤에는 3루수 포지션을 포기하고 외야수로 전향했다. 고교 시절에도 가끔 우익수로 출전했으나 전업 외야수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지만 임지열은 "선수라면 욕심을 가져야 한다"며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우리 팀 외야가 지금보다 경쟁이 치열해썽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2020년, 임지열은 1군 1경기 출장에 그쳤다.


2021년에는 주전 외야수 박준태와 허정협이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이탈하며 시즌 초반부터 기회를 잡았다. 초반부터 두 번의 호수비를 펼치는 등 좋은 흐름 속에서 경기를 뛰고 있었다. 그러다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앤더슨 프랑코의 몸쪽 깊숙히이 파고드는 공을 손에 맞고 말았다.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묵묵히 1루로 진루했고, 주자의 역할까지 모두 해냈다. 경기 후 전치 12주 골절상을 진단 받은 임지열은 정규시즌이 끝날 때까지 1군에서 27타석의 기회만을 더 부여받았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2022시즌. 데뷔 9년 차. 여전히 퓨처스리그 성적은 좋았지만, 1군에서 많은 기회를 받기에는 수비가 애매했다. 지난 8월 7일 콜업 전까지 1군으로부터 두 번의 부름을 받았으나 여섯 경기 출장에 그쳤다. 제아무리 2군 여포라도 한 번 1군에 다녀오면 허탈감에 방망이가 식기 마련이지만, 임지열을 꿋꿋이 방망이를 돌렸다. 일주일 전 '세 번째 1군 콜업' 전까지 북부리그에서 타율 2위(.313), 최다 안타 3위(55개), 2루타 1위(18개), 홈런 1위(8개), 장타율 1위(.554)의 맹활약을 펼쳤다.


어쩌면 구단의 이번 시즌 전력 구상에는 '임지열'이라는 이름 석 자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규시즌 개막 전 연습경기·시범경기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고, 시즌 초반부터 타선의 생산성 문제가 심각했음에도 코치진은 철저히 임지열을 외면했다. 하지만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도 키움 야수진의 빈타는 여전했다. 서른일곱의 1할 타율 무홈런 외야수를 꿋꿋이 1번 타순에 넣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됐고, 임지열은 여전히 2군에서 잘 쳤다.


1군 4년 차 시즌, 세 번째 콜업, 세 번째 경기의 세 번째 타석. 마운드 위 투수는 KBO리그에서 스플리터를 가장 잘 던지는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 장민재. 4점 차로 앞선 상황이었고 루상에는 단 한 명의 주자도 없었다. 그러니 삼진을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임지열을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지열은 늘상 그랬듯 진지한 자세로 타석에 임했다. 그리고 장민재의 스플리터를 힘껏 걷어 올린 타구가 힘을 잃지 않고 쭉쭉 뻗어가더니, 포물선을 그리며 그대로 담장을 넘어갔다. 데뷔 첫 홈런의 순간이었다.


임지열은 지난 일주일 동안 3할 6푼 4리의 타율과 1.065의 OPS를 기록했다. 15타석 이상 소화한 키움 선수들 중에서 가장 잘 쳤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꿈을 좇아 10년 가까이 달려온 대가가 기대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다면, 당신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그 세월을 보내는 중간에 망설이거나 지쳐 주저앉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임지열은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다. 27세의 나이는 야구선수로서 결코 많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의 이번 일주일은 지난주보다 더욱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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