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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Jul 29. 2023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팀이 선수보다 위대할 때만

2023.07.09 前 키움 히어로즈 최원태

키움 히어로즈가 LG 트윈스에 토종 선발 에이스 최원태를 내주고 유망주 이주형과 김동규, 2024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받는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어느 팀이 이득이고 어느 팀이 손해니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키움이 아직 넥센이었고 히어로즈의 홈 경기장이 고척 스카이돔이 아닌 목동 야구장인 시절부터 이 팀을 응원해 왔던 사람들에게 있어 대단한 상징성을 갖는 존재였으니까. 




2017년 4월 9일 두산전에서 7이닝 5탈삼진 2실점으로 호투한 최원태.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최원태는 키움이 2008년 우리 히어로즈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후 단 한 명의 선발투수도 육성하지 못하던 중 마침내 길러내는 데 성공한 '예쁜 막내'였다. 나아가 10개 구단이 심각한 타고투저 속에서 단 한 명의 풀타임 선발투수도 육성하지 못하는 가운데 덜컥 등장한 '한국 야구의 보물'이기도 했다.


신생구단 시절의 히어로즈에는 내일의 경기를 준비할 비용이 부족했고, 부족한 잔고를 채워줄 관중이나 광고주도 없었다. 그래서 국가대표 좌완 에이스 장원삼을 팔고 풀타임 1년 차에 13승이나 올린 이현승도 팔았으며 너클볼의 달인 마일영도 팔았다. 내친김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망주까지 싹싹 긁어 팔아 치웠다. 겨우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보니 1년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돌아줄 수 있는 투수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든 유망주를 육성해 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150km/h를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도 실패하고 159km/h를 던지는 우완 투수도 실패했다. 2016년에 신재영이 신데렐라처럼 등장했지만 원 히트 원더로 남았다. 그렇게 9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히어로즈가 서울 땅에 자리 잡은 지 10년 차 되던 해에 최원태가 나타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직전 해까지만 해도 '썩 위력적이지 않은 강속구를 던지던 유망주'가 '변형 패스트볼의 달인'이 돼서 돌아왔다. 공이 조금 빠르더라도 타이밍에 맞춰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타자들은 홈 플레이트 앞에서 우타자 몸쪽으로 춤추듯 휘는 147km/h의 투심 패스트볼에 맥을 못 췄다. 시즌 첫 선발 등판 경기서 5회까지 단 한 점만을 내줬다. 다음 경기에서는 7이닝 3피안타 2실점으로 생애 첫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에 성공했다. 그다음 경기에서도, 다다음 경기에서도 7이닝을 연거푸 던지더니 5월이 돼서는 아예 도미넌트 스타트(8이닝 이상·1자책 이하 투구)를 끊어 버렸다. 


정규시즌 등판을 마칠 무렵에는 어엿한 10승 투수가 되어 있었다. 만 25세 이하의 투수가 규정이닝을 소화하며 10승 이상을 올린 경우는 구단 역사상 최원태가 처음이었다. KBO리그로 범위를 넓혀도 만 20세의 투수가 규정이닝과 10승을 동시에 달성한 것은 2008년의 김광현(162이닝·16승) 이후 9년 만의 일이었다. 




풀타임 선발 2년 차에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았던 최원태. (사진 출처 : OSEN)

최원태는 짧은 기간 동안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풀타임 2년 차에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하는 등 소속팀과 조국을 모두 대표하게 된 '든든한 소년가장'이었다. 팬들은 그가 김하성, 이정후, 박병호와 함께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하리라 확신했다.


당시 KBO리그는 저마다의 롤모델을 꿈꾸며 갓 프로 유니폼을 입었을 신인 투수들에게 결코 상냥한 무대가 아니었다. 리그 평균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가 0.8을 훌쩍 넘어가는 '극타고투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팀 평균 평균자책점이 4점대 초반이기는 했지만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을 도는 투수 중 3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이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2점대 평균자책점은 단 한 명이었다(조쉬 린드블럼). 최원태는 그해 아시안 브레이크 직전까지 리그에서 10번째로 많은 이닝(134.1이닝)을 소화하며 아홉 번째로 낮은 평균자책점(3.95)과 세 번째로 많은 승리(13승)를 올렸다. 


2019년에는 타고투저 현상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풀타임 선발 1년 차에 4점대 중반, 2년 차에 3점대 후반이었던 최원태의 평균자책점도 3점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데뷔 이래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3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스포츠 언론과 야구팬들은 그의 3년 차 풀타임 선발 시즌을 '아쉬운 한 해'로 평가했다. 야구계가 최원태라는 이름 석 자에 걸었던 기대는 겨우 준수한 토종 선발투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고작 5년 차 고졸 선수가 이뤄낸 것들이었다. 




한국시리즈 4차전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직후 팀 동료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최원태.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최원태는 지난 3년간 부상과 부진으로 팬들의 가슴을 애태웠던 '아픈 손가락'이었다. 2020년에는 새로 사령탑에 오른 손혁 감독(現 한화 단장)의 코칭을 받아 최고 150km/h의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속 상승에만 포커스를 둔 무리한 투구폼 교정 탓에 5점대 평균자책점에 그치며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냈다. 2021년에는 다시 이전의 폼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좀처럼 밸런스를 되찾지 못하며 커리어로우를 경신했다. 지난해에도 최원태의 부진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앞선 2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선발로서 좀처럼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가을부터야 겨우 제 실력을 가감 없이 뽐내기 시작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에서 불펜 투수로 나서면서 도합 177구를 던지며 팀의 허리를 책임졌다. 우승이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팀에 동화되어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 팬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좋게 얘기하자면 경기 외적으로도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팀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듯한 무덤덤한 태도로써 오해를 사기도 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거듭된 부진에 지쳐 최원태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한 이들조차 그가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글러브에 구단 로고를 자수로 박으며 시즌을 시작한 올해는 어제까지 리그 전체 이닝 11위(102.1이닝), 평균자책점 10위(ERA 3.25), 투수 sWAR 8위(2.85), WHIP(이닝당 볼넷+안타 허용률) 7위(1.16) 등 무수한 지표에서 10위권에 들며 야구계가 기억하던 최원태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왔다. 신인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던 올드팬들은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의 자리를 향해 다시 달려가기 시작한 그를 보며 뭉클함을 느꼈다. 2019년 이후 고척돔을 찾기 시작한 팬들은 150km/h 후반의 광속구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안우진과 달리 변화무쌍한 유인구로 타자를 맞춰 잡는 토종 2선발의 투구에 열광했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최원태는 지난 8년간 역대 히어로즈 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에 선발투수로 나서며(172경기·2위 밴 헤켄 156경기) 토종 투수로서 가장 많은 선발승을 올렸다(66승).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던졌고(963.1이닝·1위 한현희 1039이닝) 세 번째로 많은 삼진을 잡으면서(675개·1위 밴 헤켄 860개) 토종 투수 중 네 번째로 높은 WAR을 기록했다(15.10·1위 손승락 25.29). 


그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70승 고지를 밟은 토종 투수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부상을 당하지 않는 한 2024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하기 전까지 아무리 못해도 80승은 올렸을 테다. 만일 팬덤이 바라던 대로 다년 계약을 했다면 100승, 혹은 그 이상을 노리는 팀의 레전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전부 무의미하게 됐다. 


<스포츠 조선>의 박재호 기자가 자신의 유튜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키움 구단은 애초에 최원태와 다년 계약을 체결하려 시도한 적조차 없었다. 은퇴를 앞둔 30대 중·후반의 외부 영입 베테랑 원종현, 이형종, 이원석에게는 총 55억 원을 안겨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이정후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모습을 본 구단은 윈나우를 포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시즌 전략을 수정했다. 새로 그린 청사진 위에 최원태의 이름은 없었다. 


그 결과 신인 시절 '예쁜 막내'였고, '든든한 소년가장'이었다가 잠시 '아픈 손가락'의 시기를 거쳤으며, 결국 재기에 성공하며 프랜차이즈의 길을 밟아 나가던 최원태는 이제 키움에 없다. 버건디 유니폼을 입고 원정 경기에 나서지 않는다. 1회 초 고척 스카이돔의 마운드를 밟지 않는다. 오늘 오후 여섯 시에 삼성-키움전 선발 투수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경기 시작 전 몸을 푸는 대신 짐을 쌌다. 라커룸 짐을 뺄 때 구단 로고를 자수로 박았던 그 글러브도 가방에 챙겼을까? 잘 모르겠다.




2019년 1월 15일 '키움 히어로즈' 출범식. 이제 단 한 명만이 남았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팀이 선수보다 위대할 때는 그렇다. 구단이 창단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해부터 포텐을 터뜨리며 국가대표 내야수로 도약했던 김민성은 FA 자격을 취득했을 당시 이듬해 3월까지 구단의 냉대 속에서 무적 신세로 지내야 했다. 2019년의 키움 히어로즈에 '김민성'이라는 이름 석 자는 구상에 없었으니까. 그의 빈 자리는 송성문, 김웅빈, 장영석 등의 유망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어 보였으니까. 결국 김민성이라는 선수는 팀보다 위대하지 않았으니까.


육성선수 신분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MVP 시상식의 무대까지 올랐던 '히어로즈의 간판스타' 서건창은 시즌 중 트레이드로써 유니폼을 갈아입어야 했다. 선수단의 일탈로 선발 로테이션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버렸으니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 인센티브를 받지 못하면 이듬해 구단 운영에 막대한 차질이 생겨버리니까. 그가 KBO리그 최초 단일 시즌 200안타의 기록을 작성한 국가대표 2루수였든 말든 지금의 얘기는 아니니까. 눈앞의 서건창은 몇 년간 꾸준히 노쇠화를 겪고 있으니까. 2루 공백은 송성문으로 메우거나 김혜성을 2루수로 전향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니까. 서건창이라는 선수는 팀보다 위대하지 않았으니까.


2010년대 KBO리그를 대표했던 홈런왕 박병호는 FA 자격 취득 후 구단이 협상 자체를 거부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른 팀에 이적했다. 그의 FA 직전 두 시즌의 모습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마침 구단이 재정상 어렵기도 했으니까. 1루, 4번 타자 공백은 각각 김웅빈과 야시엘 푸이그로 메울 수 있어 보였으니까. 박병호라는 선수는 팀보다 위대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프런트가 봤을 때는 그랬으니까.


키움은 지난 수년간 팀이 선수보다 위대함을 증명했는가? 김민성을 내쫓다시피 한 다음 자신들의 예상대로 3루 공백을 깔끔히 메웠나? 트레이드 직전 노쇠화가 진행 중이던 서건창만큼이라도 치는 타자가 1번 타순을 맡아주는 중인가? 이명기, 김수환, 김웅빈 등의 유망주가 FA 직전 박병호보다 좋은 타격으로써 주전을 차지했는가? 2017년의 고의 탱킹은 2019년 신인 드래프트의 대성공으로써 성공적으로 끝났나? 선수들은 팀보다 위대함을 증명하지 못하는 순간 쫓겨나다시피 이적했는데,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고척 스카이돔 1층 단장실에 앉아있던 이들 중 그 누구라도 책임을 졌나? 그보다 높은 자리서 지시하던 사람들은?



신인 시절의 최원태.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다시 최원태 이야기로 돌아가자. 갓 1군에 올라와 프로의 벽을 실감하던 최원태부터 지켜봤다. 그래서 'LG 트윈스의 최원태'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워낙에 감정적인 사람이라 최원태가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잠실구장 마운드를 오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저항 없이 울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프로야구 시청은 가급적 피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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