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식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면서 리더로서 가장 크게 실수할 뻔한 사건이 있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 부분이다. ‘속도와 방향’의 이야기다. 앞 선 글에서 말했지만 기존 대기업의 혜택을 버리고 팀원 4명과 함께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했다. 회사를 옮기기 전까지 우리의 포부는 대단했다. 물론 지금도 목적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순간을 여러 번 느꼈다.
내가 리더여서 인지, 아직 많이 부족한 탓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짧은 3개월 안에서 여러 번 좌절을 느끼고 나니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리더이기 때문에 함께 온 팀원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언가 보여주고 싶었던 생각에서 시작된 것 같다. 본래 목적했던 바가 쉽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종 목적까지 STEP by STEP으로 하나씩 나아가자 논의했었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발걸음을 바쁘게 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최종 단계를 급하게 서둘러 진행하고자 했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사람인 나로서는 영글지 않은 제안서를 멈출만한 제동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팀원의 도움을 받았다. 인정받는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팀원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회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나만의 사심이 가득 담긴 제안서를 현실적으로 꾸려준 것은 팀원들이었다. 나름 고민해서 만든 초안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제안서를 준비해서 설명하는 팀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제안 내용도 좋았지만, 지금 내 제안에 대하여 제동을 걸어주는 현실감이 무척 감명 깊었다.
그날 저녁, 잠이 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리고 나 스스로의 답은 ‘속도와 방향’이었다. 우리 팀의 방향은 모두가 같다. 한 가지 목적으로 가지고 서로가 의논하면서 만들어가는 중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해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 위해 하나씩 배우고 직접 해보면서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각자의 속도는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번 제안의 경우 내 속도가 너무 빨랐다. 다행한 것은 혼자만 빨리 달렸으며, 그것을 멈추어 줄 팀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의 끝에 감사함이 걸렸다.
다음 제안 회의를 하면서 서두를 고마움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 속도에 대해서 너무 빨랐음을 인정했다. 그 속내에 팀원에 대한 책임감과 성공에 대한 욕심이 있었음을 알고 있는 팀원들은 되려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새로운 제안 플로우를 가지고 다시 살을 붙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현실적은 논의가 오가면서 제안의 속도가 붙었다. 물론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본래 해오던 업무에 반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정도의 제안 엣지를 고민하고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속도와 방향에 대하 얘기했다. 목표를 향해 가는 속도는 다 함께 반 발자국씩이다. 운동회 때 3인 4각과 같다. 누구 한 명 호흡이 달라지면 함께 넘어진다. 왼발, 오른발 순서와 구호에 맞춰 나아가야 넘어지지 않고 속도 내어 갈 수 있다.
기존 대기업의 그늘에서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었다. 속도는 내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한들 시스템이 제어를 한다. 속도를 내기 위한 제반 사항과 제약 사항이 많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스템을 건너뛰고 홀로 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전 회사에서는 발의했던 의견이 1년 넘게 ‘좋다고’만 피드백을 받았을 뿐 실제 진행되지 않다가 경쟁사에서 현실화될 무렵 급하게 진행하다 정리되지 않은 채 종료된 경험이 있다. 좀 더 내가 추진력 있게 건의했으면 다른 상황이 되었겠지만 시스템의 벽에 리소스를 크게 들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좋았던’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로 끝나버렸다.
이직 후 스타트업은 달랐다. 결정권도 더욱 많아지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늘었다. 시스템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 역시 내가 만들면 된다. 속도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사인 볼트가 아니다. 그런데 100m를 9초대에 뛰라고 하면 부상을 당하거나 넘어질 테다. 그렇지 않더라도 애초에 능력이 되지 않아 그 시간에 들어오기도 어렵다. 우리는 우사인 볼트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당장 론칭하기에는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충분한 인큐베이팅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함께 업무 하는 스타트업 파트너사들이 사업 초반에 나와 같은 ‘속도’의 문제를 많이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락한 그늘에서 나와서 생존이 걸린 현실을 목도하니, 사람의 마음이 쉬이 급해지는 것이다. 찬찬히 복기하며 앞으로 가기로 다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우리는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지에 안착하면 된다는 사실을 모든 업무에 적용해야 한다.
대표님과의 미팅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내 부족이다. 급하게 가려다가 체할 뻔했던 이야기를 말씀드렸고, 인생 선배로서 경영인으로서 조언을 요청했다. 돌아온 이야기는 ‘그래서 더 기대된다’는 내용이었다. 보통 경영을 하다 보면 반대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무진들이 열정을 담아 열심히 준비해 온 제안서를 리더가 리뷰를 하면서 ‘다시 해와’라고 피드백하는 경우다. 열정을 담아 제안을 쓰는 리더와 그것에 대해 다시 열정을 담아 피드백하고 서로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 신선하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의 수평적 조직문화가 회사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고 모두 지치지 않은 한 해가 되길 당부했다. 속도, 방향과 더불어 또 하나 배웠다. 3인 4각을 할 때 우리에게 리더는 없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나는 조직적으로 리더의 위치에 있지만, 지시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먼저 구호를 외치고 파이팅 하면서 이끌어가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 발을 헛디디였을 때 보듬어주고, 내가 한 실수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리더구나, 권위는 행동에서 나오는구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오랜 기간 마케팅업에 종사하면서 나름의 경험치를 쌓아왔기 때문에, 나만의 노하우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급변하고 있으며 나 역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에 특히 지금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함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누군가, 나와 같은 새로운 시작을 함에 있어서 혼자가 아니라면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그리고 3인 4각 하듯이 함께 호흡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