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도다

대학원생의 성장일기 39

by 포텐조

벽돌시리즈 삼십구 번째

힘든 일상을 보내다 보면 사람은 남 탓, 자기 탓도 하지만 인생 전반에 걸친 고민도 하게 된다. 자기만의 철학적 변화를 겪는 순간이 온다. 그동안 흐리멍덩하던 사유들이 재정립되거나 가치 평가를 하게 된다. 반대로 힘든 일상이 아니고 행복하거나 기쁜 순간에도 변화를 겪는다. 본인이 이런 감정을 겪는 것은 과분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것이 찾아와야 한다는 등 어떤 사유든 의문이 점차 명확해지고 이는 확신이 되어간다.


삶이 허무하다. 그러므로 "왜 아등바등 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건데 굳이 이렇게 노력해서 뭐 하나"등의 허무주의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외로 많이들 생각하는 것 같다. 가져봤자 혹은 잃어봤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거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도 많고 일생이 고난의 연속이고 부정적인 것만 가득하다는 염세적인 시각들도 많다. 허무주의 또는 니힐리즘이라 불리는 이런 비슷한 사상이 요 근래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생각들은 당연히 아니다. 이미 고대에서부터 다양한 현인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 오고 각자만의 의견을 피력했다.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석가모니 또한 어린 시절 출가하기 전 그런 철학적 변화가 다가왔다. 왕자로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 시 백성들의 고통 속 생로병사와 물질적 탐욕과 욕망 그리고 천박한 언행들이 석가모니에겐 점차 이런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속세로부터 떠나기를 결심하는데 영향을 준다. 아버지가 재차 말렸지만 그는 끝내 출가를 하게 되고 인류의 4대성인이라 불리는 그의 행보를 시작한다.


석가모니는 다른 고행자나 수도자들이 금식이나 몸에 스스로 끔찍한 고통을 주며 혹독하게 단련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따라 하기도 하며 몇 년간 다양한 수행과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중도의 깨달음과 통찰을 얻고 마침내 민중에게 자기의 가르침을 설파하다 특별한 삶의 왕궁이 아닌 흔한 민중이 널려있는 야외에서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열반하게 된다.


이윽고 제자들이 구두를 통해 그리고 기록을 통해 가르침을 이어나가다가 마침내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오늘날 인류에게 그의 가르침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대단히 현실적이고 아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철학을 제시해 주었다. 불교철학을 깊이 있게 보지는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나 다양한 교리와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 사람들이 아니 심지어 불자들도 이른바 "공"사상을 착각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비어있다는 뜻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허무함 또는 만물이 헛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교를 허무의 종교 내지는 죽고 나서 윤회나 노리자는 뜬금없는 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방금 서술하듯 석가모니는 일단은 중도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그에 파생된 사상을 기초로 볼 때, 또 유식이라는 흔히 자기 생각하기 나름이다라고 요약할 수도 있는 개념을 보건대, 공 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결국 상대주의적인 시각을 가지자는 이야기다.


절대적인 것보다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각자의 시각에 따라서 기준도 다르다는 말인데, 비어 있다는 말과 허무주의라는 생각도 어떻게 보면 상대주의적 범위에서는 그것도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일 뿐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이라는 개념은 비어있는 상태이기에 가득 채워나갈 수 있는 생각도 인정한다. 허무주의는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의 카테고리인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부처의 관점이고 불교의 교리이다.


그렇기에 더 나아가 어쩌면 석가모니는 실존주의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번 글에서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이 삶에 대한 의미를 제시하듯 석가모니 또한 비어있기에 채워나감을,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기에 자기에게 맞는 주관적 진리를 찾으라는 말도 어쩌면 일맥상통하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의 삶을 좋든 싫든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설계하고 구축해 나가는 것은 실존주의자들의 일생의 숙제이다.


상대주의적 관점의 플랫폼에서 보자면 나는 허무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허무하게 되면 정말 만물이 헛되다는 느낌과 결국 끝이 없는 공허함과 염세주의적 시각만 확증할 뿐이다. 그동안 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개고생(?)하다가 마침내 나 스스로 실존주의자가 되었기에 체험에서 우러나온 철학적 변화일지 모르겠다. 다만 이는 지극히 온전한 나의 시각이다.


심리치료나 심리학에서 불교철학을 아이디어로 다양한 시도나 이론적 개발을 하는 것도 그리 이질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적 다양성은 결국 내담자에게 삶의 시각을 굉장히 넓게 열어주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 자체와 고통에 대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루는 종교이자 철학이다 보니 겹치는 부분이 많기도 한 것이다.


농담으로 "너 왜 사냐?"라고 친구들끼리 떠든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그냥 죽지 못해 산다거나 "살아가니까 사는 거지 뭐"라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그때는 나만의 삶에 대한 기준과 사상이 정립이 안되어 있기에 두리뭉실하게 말했던 것 같다. 아직도 가끔 모임 내에서 또래들도 "그냥 살아간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요즘 허무함과 무기력을 많이 느낀다는 말도 한다. 허무주의가 진리가 아닌 것처럼 실존주의도 진리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비어있는 공허한 자신을 채워나가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므로 그 어떠한 선택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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