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4화 / 2장 우연인가 운명인가
장편소설 빛의 여정 14화 / 2장 시작(우연인가 운명인가)
아무런 장비, 아무런 물건도 손에 쥐지 않은 채 걷고 있는 지목당한 사람들을 중간에 두고 좌우로 호위병들이 배치되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사람들은 배웅하러 온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고 더 이상 그들의 만남은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우는 아이도 있었다. 여전히 마음이 불안한 부족민들은 크리네스 4세가 진땀을 빼가며 달래고 있었다. 아르한도 마찬가지였다. 네이즈가 입성했던 그 도로를 지나가면서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 말과 이그네움을 비워낸 마차도 천천히 걸어갔다. 들어올 땐 24명, 정문을 향해 나아갈 땐 약 70명의 행렬. 네이즈가 선두에서 말을 몰고 가는 건 똑같았다.
뒤로 남겨진 광장 한켠에선 바삐 움직이며 크리네스가 준비한 마차에 공물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과 비워낸 이그네움을 창고로 옮기는 사람들로 다시 분주했다. 그 외에 의식과 행사장을 청소하고 다시 똑같은 일상의 모습으로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로이딘은 4명씩 붙어가는 행렬 중반에 위치해 걷고 있었다. 시테온과 루네는 같은 줄은 아니였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성문이 다시 입을 벌리고 세찬 바람의 동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씨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춥지만, 얼어죽지는 않을 수준만큼의 날씨였고 눈과 우박은 내리지 않았다. 이틀만에 다시 나가는 로이딘은 자신이 걸어왔던 숲이 저 멀리 보였다. "서쪽으로 가려는 걸까? 남쪽?" 로이딘은 먼저 어디로 사람들을 데리고 갈지가 궁금했다.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라면 크리네스 영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리네스에서 찾아 볼 건 크리네스 마을 뿐이며 그나마 숲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라면 로이딘이 향한 서쪽 숲으로 가야했다. 네이즈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목적 그리고 크리네스와 아르한에게 질문해서 얻은 대답을 모아서 머리를 굴려보면, 정말 별 것 아닌 채석장에서 이틀 간 돌만 줍다가 크리네스 경비대가 자신들을 데리고 복귀하는 것이 사실일 까? 채석장은 로이딘이 가진 정보로는 남쪽이나 서쪽 군데 군데 순수한 석회암이나 대리석을 캐는 수백년도 더 된 허름한 곳이였고 채석 효율이 안좋아서 모든 부족들이 손을 놓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아보의 사제들까지 와서 "조사"를 하고 있다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정문이 뒤에서 닫혔다. 크리네스 성벽의 모습이 점차 멀리 작아지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저멀리 네이즈와 호위대장 그리고 부대장의 말들이 숲으로도 향하지 않고 동쪽이나 남쪽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서쪽도 마찬가지. 그들은 달려왔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북쪽? 설마 납치야? 뭐야? 크리네스를 벗어나려는 건가?" 몇몇 사람들도 로이딘과 똑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그중 누군가가 옆에 있던 호위병에게 질문했다.
"저 혹시 크리네스를 벗어나는 겁니까?"
"닥쳐라!"
호위병이 화를 내며 질문을 받지 않았다. 큰 소리에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고 네이즈와 선두에 섰던 일행들도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무심하게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침묵과 공포사이, 사람들은 말 없이 걸었다. 마치 크리네스를 벗어나자마자 그들의 보호막이 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모를 불길함이 예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퍼런 창날을 보노라면 질문을 더욱 더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방금 전의 고함소리가 끝나고 다시 말 없는 행렬 속의 로이딘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북쪽? 북쪽에는 뭐가 있지? 거긴 채석장이 없을 텐데" 시테온과 루네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통수만 보였고 로이딘은 덩달아 뒤통수에만 시선을 둔 채 자동적으로 걷고만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손발이 자유로워 걸으면서 옷을 잡아 정리하거나 옷깃에 손을 넣어 추위를 달랠 수는 있었다. 더욱이 자칫하면 죽음 앞에서도 저항은 해볼 수 있으리라.
크리네스의 부족민들은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표면적으로든 왕좌가 없는 자유마을 혹은 자유민들의 공동체였기 때문에 외부 세력에게 본인들이 좌지우지 된다는 건 "자유"민이라는 키워드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추위가 이 모든 것을 뒤짚어 엎었고 향후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재편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으므로 크리네스의 사람들은 추위뿐만 아니라 불안에도 떨어야 했다. 다만 지금 치루는 댓가들이 공동체의 운명을 넘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잠시 그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그네움이 없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유구한 역사와 서사를 가진 사람들이라 한들 죽음 앞에선 효력없는 옛날 이야기일 뿐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찬 바람은 벌써부터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틀 걸려 가는 거리라 참으면서 온전한 정신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기나긴 거리를 이동해야했다면, 누구보다 바깥 환경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는 부족민들은 차라리 들고 일어서는 게 나을 거란 판단도 했을 것이다. 북쪽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작은 마을의 폐허가 군데군데 이루어져 있었다. 상단이 오고가는 도로만이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로이딘이 걷고 있는 도로가 바로 상단들이 왕래하는 루트였다. 여기서 북쪽으로 계속 간다면 서쪽의 시테온의 고향인 아나티리캄이, 북동쪽에는 헤르논이 위치해 있었다.
조금만 따뜻해져도 녹아서 진창을 이루는 좋지 못한 도로는 무수한 수레바퀴들에 의해 움푹 파이고 굳은 살처럼 도로가엔 넘친 흙더미가 단단히 얼려져 있었다. 길을 계속 걷노라면 잠시 굳어져 있던 머리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로이딘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한 추리에 몰입을 하다 이틀 거리에 있는 북쪽 어딘 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크리네스 영지에 속했던 지금은 폐허로 뜯겨져 나간 아주 작은 마을이 있었다. 보잘 것 없었던 그 마을은 원래 특정 방문객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술집을 운영하며 성장 했던 곳이다. 그 특정 방문객은 대부분 순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5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