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28화 / 3장 여정의 시작
장편소설 빛의 여정 28화 / 3장 여정의 시작
데센은 울고 불며 호위대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거센 발차기로 나뒹굴게 되었다. 동굴에서의 기습은 그간 무장했던 사제들이 동지라 생각했던 자들의 마차에 무기를 놓고 내린 바람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시퍼런 칼날 앞에 속절없이 죽임당한 7명의 사제들은 어느 동굴 안에서, 초록 로브가 피로 물든 채 육신이 차갑게 식어갔다. 뜬 눈으로 죽은 어느 사제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는 채로 누워있었다. 그들의 비명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퍼졌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호위대장의 피묻은 칼날에 눈이 뒤집어 질 정도로 놀라며 발악하던 데센은 호위대장에게 소리쳤다.
"제발 부탁이오! 아보의 형제여, 대체 무엇때문에 이런 것인가!"
"비밀은 아는 순간 위험해지는 법이지"
네이즈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땅바닥에 절을 하듯 기어가려하는 데센은 네이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각? 어차피 크리넬 저들도 다 아는 사실 아니잖소?!"
"외부에서 떠드는 건 신빙성이 없지만 내부에서 떠들게 되면 곤란해진다오"
"그치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위대장이 정확히 엎드려 있던 그의 목을 겨냥해 칼을 내리쳤다. 예리한 칼날은 육신의 껍데기를 가볍게 잘라내버렸고 데센이 엎드려있는 바람에 서있던 호위대장의 베기는 더욱 힘을 받아 목을 쉽게 잘라냈다. 이제 목 없는 시신과 7구의 시신만이 이 동굴과 함께 있을 것이다.
마차에서 사제들의 잡다한 소지품도 내리려던 호위병을 보면서 네이즈가 외쳤다.
"잠깐, 혹시라도 도적떼의 소행일 수도 있단 착각도 만들어 놔야 할 거야. 무기들만 어지럽히게 뿌려놓도록."
네이즈의 표정은 시신들처럼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는 입꼬리와 미간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히 이야기하며 동굴 안과 바닥을 살폈다. 호위대장은 그간 자신의 칼에게 피를 먹이지 못했으나 드디어 해갈 해준 것에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무자비한 칼 부림은 호위병들의 자랑거리였다. 핏빛 늑대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사제들에게 한 것일까? 네이즈의 명령에 호위병들은 마차에서 사제들의 무기만을 가져와 시신 주변에 배치했고 그후 시신을 뒤지며 소지품을 확인하고 반지와 목걸이등을 챙겼다.
"자, 이제 갈 길 가자고"
무기를 닦던 호위병들에게 네이즈가 두 팔을 앞으로 저으며 동굴 입구쪽으로 가르키며 걸어갔다. 시신 근처에 에워쌌던 병사들은 칼을 칼 집에 다시 꽂았다. 투구를 고쳐쓰고 마차를 다시 끌며 호위대장의 뒤를 따랐다. 노을 진 풍경에,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인원들을 마주하며 안장 위로 올랐다. 아무도 찾지 못할 피로 물든 동굴을 뒤로 한 채 24명의 네이즈 일행은 다시 목적지로 향해 떠났다.
반면 크리네스 4세와 경비병 일행은 만신전에 도착해 44명의 인원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다렸던 이들은 좋아하며 환호했으나 족장이자 마을의 장로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이지 못했다. 그토록 가면 쓰기를 잘했던 그가 그간 완벽했던 아보테와의 관계에 커다란 금이 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머지 인원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만신전에서 벌어진 일들. 돌을 주워 선별을 받고 나머지 돌들은 밖으로 가져다버리는 독특한 작업들. 그리고 로이딘이라는 사람이 어디선가 조각을 주워 오더니 네이즈에게 다가가 큰 섬광을 터뜨려 모두의 의식을 혼란케 하며 눈을 못 뜨게 만들었던 일. 다시 정신을 차리자 로이딘과 시테온 그리고 루네라는 사람이 사라져버린 일 등등. 지켜본 사람들이 낱낱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네이즈 쪽 사람들 위치에 가까이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모른 척하며 들었던, 사제들의 말이 도난 당한 이야기까지 크리네스 4세에게 보고했다. 그는 잠잠히 듣다가 로이딘이 등장하고 섬광이 터져버렸다는 부분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안에서 용암이라도 끓는 지 식히려는 인내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시테온과 루네, 그들이 불쌍해서 기껏 받아주었더니 마을에 얹혀 살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공동체를 뒤흔드는 짓을 해버렸는 가? 온갖 욕이란 욕을 머릿 속으로 해대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장로는 크게 숨을 들이 쉬고 코로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대답했다
"개 자식들, 어린 놈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군"
특히 로이딘을 떠올리면서 그런 짓을 할 놈이 아닐텐데라며 다소 의아했지만 그보다 마음 속 분노가 더욱 컸다.
옆에 서 있던, 도망친 3명을 알고 지내던 몇몇 경비병들은 크리네스 4세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알고 지냈다고 자기네들에게 불똥이라도 튈까봐 노심초사했다.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니 붙잡고 있는 그의 검자루가 금방이라도 검집에서 뽑혀나와 누구라도 벨 까 심히 두려워 했다.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던 베테랑 경비병들은 그가 냉혹해지면 어디까지 냉혹해질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결단과 판단은 검처럼 예리하여 한 번 잘리면 영원히 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쫓겨난 자는 영원히 쫓겨난 것이고, 사형당한 자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크리네스 4세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만신전 안을 간만에 좋지 못한 이유로 구경하게 되었다. 그가 다스리는 땅에서 무기력한 저주의 계절과 날씨 탓에 신들의 은총조차 닿지 못한 이곳과 인근 마을들. 기둥만 서 있는 채로 지붕이 무너져 내려버린 신전 그리고 헤집어진 바닥과 돌 파편들. 그는 말 없이 신전 안쪽을 그리고 벽들을 쳐다보며 자기네들이 처한 현실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되었다. 이그네움 없이는 결코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크리넬의 운명은 이그네움과 함께라는 것을.
29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