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요가 에세이 <생각은 멈추고 숨은 내쉬세요>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다. 단순히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회사 업무와 관련된 결정까지. 나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곧잘 물었다. 그런데 사실 내 마음속에서는 늘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래, 그렇게 결정하는 게 맞지.', '당장 시작해도 되겠어.' 같은 찬성에 가까운 대답이다. 나는 이런 대답이 상대의 입을 통해 나오길 바랐다. 무엇을 하기 전에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서야 이런 행동이 나 스스로 확신과 관계된 것임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었을 때를 염두해 결정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패턴은 나 스스로 자신감이 부족해서 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해 본 적 없는 어떤 것을 시작할 때 제일 두렵다. 새로운 것을 행할 때 불쑥 여러 생각이 끼어들어 이것을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해준다. 놀랍게도 이때 등장하는 생각들은 논리 정연함은 물론 나를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때로는 너무 사소해 웃기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사소한 것들은 차곡차곡 내 일상에 쌓여 무엇인가를 시도하기조차 힘들게 만든다.
최근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나는 요가 클래스에 새로 산 민소매를 입고 갔다. 클래스 시작 전에 몇 가지 동작을 연습해 보고 있었는데 옷의 소재 때문인지 숙이는 동작을 할 때마다 돌돌 말려내려 와 시야를 가렸다. 옷을 묶어서 고정시켜보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래서 서둘러 선생님이 있는 카운터에 가 옷을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내 차림을 보면서 의아해하며 "왜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위에 입은 옷이 흘러내려 불편하니까 다른 것으로 바꿔 입어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속에 뭐 입었는대요? 한번 봐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내 옷차림을 살피더니 그냥 웃옷을 벗고 브라탑 차림으로 클래스에 참여하라고 했다.
평소 요가를 할 때 나는 최대한 상체를 가렸다. 겨드랑이 살과 뱃살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민소매를 입은 날도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어깨를 다 드러낸 끈으로 이뤄진 나시 브라탑을 입자니 난감했다. 게다가 그날은 제모도 제대로 안 한 상태였다. "안돼요!" 나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여분의 티셔츠를 꼭 잡아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번에 한번 해봐요. 다른 것도 아니고 브라탑인데, 일주일밖에 안된 회원들도 이렇게 입고해요."라고 말하며 티셔츠를 감추고 나를 클래스로 떠밀었다.
내 생각들은 꾸물거리며 나와서 브라탑만 입고 요가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제모를 안 했는데 양손을 쳐드는 동작을 했을 때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 털이라도 발견하면 어쩌지?', '아직까지 팔뚝 살이 철렁거리는데 남들 보기에 너무 흉한 거 아닐까?', '세상에 이 브라탑은 언제 빨았지?' 등의 생각들은 내 호흡보다 빨리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클래스는 시작되었고 나는 그렇게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요가에 집중하려 애썼다.
다행히 이 모진 생각들은 동작 하나를 이어갈 때마다 사라졌다. 옷이 가벼워지니 더 편하고 가볍게 느껴졌다. 또한 양손을 쳐들어 고정해야 하는 동작에서 너무나 낑낑거렸던 나머지 내 겨드랑이 털을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클래스가 끝나자 그런 걱정들이 너무 사소해 나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차림새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나만 의식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벼운 옷차림의 옷을 입은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브라탑 몇 개를 더 구매했다.
무엇을 하기에 허락을 받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그날 누군가가 날 대신해서 '브라탑을 입어도 좋아!'라는 대답을 내어주길 바랬다. 다행히 선생님의 끈질긴 회유로 나는 브라탑을 입고 클래스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라탑을 입고 요가를 하는 것 이상의 상황에서는 나는 누군가의 허락이 더 간절하다.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이 보편과는 다를 때 더 그렇다. 나는 이런 대답에 누군가 내 대신 대답해 주길 바란다.
하루에 커피 세 잔 마시는 건 무리일까?, 요가하는데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될까?
여전히 애인 없이 살아도 괜찮을까?, 결혼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아도 괜찮을까?
청약이나 부동산에 대해 몰라도 될까? 등등
여전히 이런 질문들은 내 주변에 남아있고 나는 긍정에 가까운 허락을 받고 싶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왜 또다시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의 허락이 간절한 것인지 헤아려 보려고 한다. 그리고 속으로 '더 이상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 하루에 커피 세 잔을 마셔도 스스로 괜찮다면 물어볼 필요 없겠고 더 많은 수입이 들어온다면 내가 좋아하는 요가를 할 때 돈을 얼마를 쓰건 상관없을 것이다. 애인이나 결혼의 유무도 나 스스로 확신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청약과 부동산도 내가 원할 때 배우면 그만이다.
이 질문의 답들은 심플하다. 그리고 내 자신감과 닿아있다. 설령 누군가 질문에 '괜찮지 않아'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내어준다고 해도 나만 확신에 차 있으면 그건 그저 타인의 의견이 될 뿐이다.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때 오히려 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이다. 요즘 나는 동작을 연습하는 것처럼 많은 의문들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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