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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Sep 21. 2021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나의 요가 에세이 <생각은 멈추고 숨은 내쉬세요>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다. 단순히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회사 업무와 관련된 결정까지. 나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곧잘 물었다. 그런데 사실 내 마음속에서는 늘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래, 그렇게 결정하는 게 맞지.', '당장 시작해도 되겠어.' 같은 찬성에 가까운 대답이다. 나는 이런 대답이 상대의  입을 통해 나오길 바랐다. 무엇을 하기 전에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서야 이런 행동이 나 스스로 확신과 관계된 것임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었을 때를 염두해 결정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패턴은 나 스스로 자신감이 부족해서 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해 본 적 없는 어떤 것을 시작할 때 제일 두렵다. 새로운 것을 행할 때 불쑥 여러 생각이 끼어들어 이것을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해준다. 놀랍게도 이때 등장하는 생각들은 논리 정연함은 물론 나를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때로는 너무 사소해 웃기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사소한 것들은 차곡차곡 내 일상에 쌓여 무엇인가를 시도하기조차 힘들게 만든다.


최근에도 그런 경험을 했다. 나는 요가 클래스에 새로 산 민소매를 입고 갔다. 클래스 시작 전에 몇 가지 동작을 연습해 보고 있었는데 옷의 소재 때문인지 숙이는 동작을 할 때마다 돌돌 말려내려 와 시야를 가렸다. 옷을 묶어서 고정시켜보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래서 서둘러 선생님이 있는 카운터에 가 옷을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내 차림을 보면서 의아해하며 "왜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위에 입은 옷이 흘러내려 불편하니까 다른 것으로 바꿔 입어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속에 뭐 입었는대요? 한번 봐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내 옷차림을 살피더니 그냥 웃옷을 벗고 브라탑 차림으로 클래스에 참여하라고 했다.


평소 요가를 할 때 나는 최대한 상체를 가렸다. 겨드랑이 살과 뱃살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민소매를 입은 날도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어깨를 다 드러낸 끈으로 이뤄진 나시 브라탑을 입자니 난감했다. 게다가 그날은 제모도 제대로 안 한 상태였다. "안돼요!" 나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여분의 티셔츠를 꼭 잡아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번에 한번 해봐요. 다른 것도 아니고 브라탑인데, 일주일밖에 안된 회원들도 이렇게 입고해요."라고 말하며 티셔츠를 감추고 나를 클래스로 떠밀었다.


내 생각들은 꾸물거리며 나와서 브라탑만 입고 요가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제모를 안 했는데 양손을 쳐드는 동작을 했을 때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 털이라도 발견하면 어쩌지?', '아직까지 팔뚝 살이 철렁거리는데 남들 보기에 너무 흉한 거 아닐까?', '세상에 이 브라탑은 언제 빨았지?' 등의 생각들은 내 호흡보다 빨리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클래스는 시작되었고 나는 그렇게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요가에 집중하려 애썼다.


다행히 이 모진 생각들은 동작 하나를 이어갈 때마다 사라졌다. 옷이 가벼워지니 더 편하고 가볍게 느껴졌다. 또한 양손을 쳐들어 고정해야 하는 동작에서 너무나 낑낑거렸던 나머지 내 겨드랑이 털을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클래스가 끝나자 그런 걱정들이 너무 사소해 나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차림새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나만 의식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벼운 옷차림의 옷을 입은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브라탑 몇 개를 더 구매했다.

 

앞으로 겨드랑이 제모는 필수다 !

무엇을 하기에 허락을 받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나는 그날 누군가가 날 대신해서 '브라탑을 입어도 좋아!'라는 대답을 내어주길 바랬다. 다행히 선생님의 끈질긴 회유로 나는 브라탑을 입고 클래스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라탑을 입고 요가를 하는 것 이상의 상황에서는 나는 누군가의 허락이 더 간절하다.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이 보편과는 다를 때 더 그렇다. 나는 이런 대답에 누군가 내 대신 대답해 주길 바란다.


하루에 커피 세 잔 마시는 건 무리일까?, 요가하는데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될까?

여전히 애인 없이 살아도 괜찮을까?, 결혼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아도 괜찮을까?

청약이나 부동산에 대해 몰라도 될까? 등등


여전히 이런 질문들은 내 주변에 남아있고 나는 긍정에 가까운 허락을 받고 싶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왜 또다시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의 허락이 간절한 것인지 헤아려 보려고 한다. 그리고 속으로 '더 이상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 하루에 커피 세 잔을 마셔도 스스로 괜찮다면 물어볼 필요 없겠고 더 많은 수입이 들어온다면 내가 좋아하는 요가를 할 때 돈을 얼마를 쓰건 상관없을 것이다. 애인이나 결혼의 유무도 나 스스로 확신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청약과 부동산도 내가 원할 때 배우면 그만이다.


 질문의 답들은 심플하다. 그리고  자신감과 닿아있다. 설령 누군가 질문에 '괜찮지 않아'라고 부정적인 대답을 내어준다고 해도 나만 확신에  있으면 그건 그저 타인의 의견이  뿐이다.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오히려 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이다. 요즘 나는 동작을 연습하는 것처럼 많은 의문들에 긍정적인 대답을   있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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