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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Dec 14. 2018

완벽한 타인

소통은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닐지도 몰라


(약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완벽한 타인>은 스스로를 '코미디' 영화라고 정의한다. 실제로 이 작품의 유머 타율은 매우 높다. 관람하는 내내 극장에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으니. 하지만 단순히 웃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완벽한 타인>이 코미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작정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을 웃기려는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냉소적인 웃음을 통해 은연중에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다. 은근한 미소와 질문 앞에 우리와 우리의 핸드폰은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다. 



2. <완벽한 타인>은 우선 기술적으로 영리하게 관객들을 휘어잡는다. 이 작품은 이른바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영화'다. 다시 말해 작품의 서스펜스가 상당히 인상적이라는 의미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것은 빠른 쇼트의 전환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배경이다. 카메라는 빠르고 간결하게 핸드폰과 인물들의 표정을 빠르게 넘나들며 쉴 새 없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조되며 이는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달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안정적이다. 다만 지나치게 예상 가능한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는 느낌이 강한데, 특히 이서진과 송하윤이라는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기존 이미지에 거의 편승하다시피 해서 다소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3. <완벽한 타인>의 스토리 역시 기술적인 부분처럼 아쉬움과 만족스러움이 공존한다. 기발하고 신선한, 동시에 납득 가능한 설정(핸드폰 게임)을 통해 관객을 사로잡는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는 본격적인 스토리를 전개하며 각 인물들의 사연들을 게임을 통해 풀어낸다. 다만 후반부는 예측 가능한 결말로 전개가 이어지고 끝내 안전한 결말은 초반부의 신선함마저 퇴색시키는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각 인물들의 스토리가 튀어나오는 중반부다.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서브플롯이 등장하는 이 중반부는 '이해와 오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중 인물들은 남편, 아내, 친구, 형수, 중년 여성,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 총각, 동성애자, 이성애자, 범죄자 등 다양한 역할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역할들로 인해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역할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40여 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과 매일을 함께 하는 배우자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인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각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이해를 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마침내 파국을 맞이해서야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이는 핸드폰 때문이 아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 핸드폰은 단지 연락수단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도 될만한, 우리보다 우리 스스로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핸드폰은 단지 불씨에 불과하며 쌓여 있던 의심과 오해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이를 반증하는 대사가 있다. '우리 친구지?'와 같은, 친밀감을 강조하는 대사는 모든 인물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사들은 오히려 인물 간의 거리감을 강조할 뿐이다. 또한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내도, 함께 지내도 사라지지 않는 거리감이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하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그저 서로 오해만이라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서 소통을 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4. 굳이 현재 사회의 가장 뜨거운 담론인 여성 이슈와 동성애 이슈를 스토리에 포함시킨 것도 '소통의 어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영화는 담론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담론을 소비하는 방식의 문제를 꼬집는다. 자신의 기준에서만 상황을 바라보고, 자신의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을 비하하고 공격하는(설사 그 타인이 자신의 아내 혹은 가장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현 세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그래서 <완벽한 타인>은 코미디다. 훌륭한 블랙 코미디다. 훌륭한 유머로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자주 만나는 사이여도 서로를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이다. 


A (Acceptable 무난함)

소통과 시작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를 줄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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