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벌 수 있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가끔 '슬럼프'가 찾아 오기 전까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패션업계에서 슬럼프의 주기는 3년을 번갈아 맞이한다는 설이 있다. 어떤 워커홀릭이라도 3년이면 큰 굴곡이 생긴다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그 말은 딱 맞았다. 3년 주기로 익숙한 업무로 인한 일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귀찮아지며 마음이 가라앉고 몸이 피곤하곤 했다. 이럴 때, 또 슬그머니 내가 잘 하고 있나,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등의 온갖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곤 한다. 이러한 슬럼프가 길어지면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주로 여행을 다녔다.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보고, 먹으며 머릿속의 잡생각을 떨치려고 했다. 가능하면 현재의 환경과 많이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것으로 머릿속을 채우려고 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슬럼프가 잘 넘어갔다. VMD는 역마살이 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장과 움직임에 익숙한 직업이라 낯선 곳으로의 장거리 여행은 기분전환에 충분히 좋았다.
휴가와 연차를 모아 참 많이도 다녔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로 여행이 힘들어지면서 내 마음이 바닥을 칠 때, 주워 담기가 힘들어졌다. 아이가 자라고 새로운 여행 플랜이 가능해 질 무렵 내 마음은 널뛰기 시작하는데, 그 동안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들을 쏟아 낼 무엇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는 여행으로도 성에 찰 것 같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날은 내가 정말 뭐하는거지? 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보내곤 한다. 뭔가 하고 싶다. 뭘 해야 내게 힘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질까… 휴…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거나 한 걸까, 아니면 혼자 좋아한다고 착각하며 그 생각에 취해 스스로를 안위하여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문득, 나 혼자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무엇인가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뭘까,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동안 잡지와 브로셔들에 밀려 내 손에 들려지지 못했던 책들이 다시 눈에 들어 오자 책읽기가 너무 즐거웠다. 최근 2년 정도는 책을 손에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림도 그려 보았다. 동사무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드로잉’ 수업을 신청했다. 조그마한 스케치북에 직선긋기, 구불구불한 선 그리기 등을 연습한지 얼마되지 않아 코로나19로 수업은 중단되고 수업료는 환불받았다. 펜, 스케치북, 물감이 아까워 책을 한권 구입해서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뭔가 챌린지가 필요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100일 그림그리기 배너를 걸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려 올렸다. 여행 사진을 보고 그렸더니 여행만 더 그리워졌다. 그나마 댓글 달아 주는 분들과 그림을 그려 달라는 분들까지 계셔서 즐겁기는 했다. 그래도 뭔가 충족되지 않는 느낌을 가지고 어정쩡한 시간들은 보내고 있을 무렵, 내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잘 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할 걸, 괜히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구나”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경쟁 구도에서 어떤 형태로든 성과를 내야 하고, 그것에 따른 평가로 보상이 따른다. 그 외 정치라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승진과 연봉이라는 보상과 업계의 스탠더드가 생기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스트레스와 슬럼프도 생기지만 성취와 보람도 큰 것이다. 나의 경우만 보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지만, 일을 ‘뛰어나게’ 잘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을 손에서 좋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살아왔던 것일까? 어릴 때 부터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고 디자인을 전공 해 온 사람에 비하면 색감을 골라내는 안목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난 화학2와 생물2까지 공부한 이과생이잖아. 게다가 유학이라도 다녀온 친구들은 확실히 보는 눈이 달랐다. 그래서 하나하나 체크하며 열심히 일 했나?
특히, 한 회사에서도 브랜드를 옮기거나, 아예 이직을 하게 되면 처음 몇 번의 업무로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다. 처음의 업무 태도와 결과가 이 사람 전체를 나타내 버려서 회복이 힘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대충이란 없다. 예민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짚어가며 신경써서 일하게 된다.
나는 왜 그것을 20년이나 일하고 나서야 깨달았단 말인가! (아니, 그 동안 부정했을 수도 있고...)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잘 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좋아하는 것은 평생의 취미로 가져야지. 취미라는 것은 잘하든 못하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 나만 좋으면 된다. 아이에게도 말한다.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잘 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라고, 취미는 언제든 네 옆에 두는 친구같은 보물상자라고,,,(알아듣든 못알아 듣든,,,)
내가 잘 하는 것이 뭘까, 나는 숫자로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며 협력하여 일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는 것을 힘들어 한다. 뭔가 디자인 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협의해 나가는 과정이 만만치는 않다. 사람의 눈은 너무나 제각각이고 말 그대로 디자인이라는 것에 정답은 없다. 이런 업무는 친분을 통해 진행해 나가는 경우도 있어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서 업무를 연결지어 보았다.
디자인하는 것을 포함하여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고 VMD(비주얼머천다이저)의 Operation도 중요한 업무다.
매뉴얼을 만들고, 브랜드에 가장 적합하게 끼워넣으며 디자인 요소들이 제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는 일,
하나의 매장 안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이 조화롭게 배치될 것.
좋다, 일을 잘 선택했구나!
덧붙여 본다.
운동이든, 그림 그리기든, 나만의 것 하나를 꼭 만들어 둘 것!
20년 넘는 직장 생활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즐겁게 일 했으니,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만의 것 하나를 꼭 만들어 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