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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Mar 26. 2020

조직의 쓴 맛 단 맛

- '단짠단짠' 보다 짜릿한 '쓴단쓴단'의 맛! -

삶은 고해라는 둥, 고통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둥 ‘고통’을 기본메뉴로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저기 고통고통 하니 고통 없이 되는 건 하나 없다는 소리가 고통스러우리만치 실감하는 바이다. 알면서도 내게는 늦게 오거나 눈 한번 질끈 감아주었으면 하는 것도 역시 고통이다. 난 당신 볼 일 없으니 그냥 지나치라고 손사래를 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만나고 싶은 고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동이 낳은 고통이고, 또 하나는 더한 사람의 고통이다. 전보다 나은 고통이고, 뒷맛까지 우러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역치가 다르다. 아무리 역치가 다르고 인내심이 눈곱만치도 없기로서니 한두 가지 일로 ‘고통’이란 단어를 서슴없이 내뱉지는 않는다. 운동할 때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한두 근육이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서 그렇다. 근육은 단결력이 강해 손에 손을 잡고 떼로 덤빈다. 자극받는 지점이 약자라면 주변 근육에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 자극 부위가 강자라면 주변 근육에 봉사정신을 발휘한다. 근육은 결코 홀로 아리랑 따윈 부르지 않는 결합조직으로 되어 있다. 조직에 몸담은 나로선 이 원리를 염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왕 받을 고통이라면 근육 과녁에 제대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박서방 동네 가서 김서방 찾는 격이면 고통은 고통대로 다 느끼고 돌연변이 근육을 키우는 꼴이니 말이다. 근육이 결합조직으로 움직이다보니 미꾸라지 세포가 있으면 몸을 흐릴 수 있다. 큰 맘 먹고 시간 낸 운동이라면 운동해봤자 효과 없다며 소매치기 당한 기분일 것이다. 남의 다리 긁는 예시 두 개만 들어 본다(한때 내 얘기가 지금은 남 얘기하듯 떵떵거린다). 내가 거룩하게 모시는 자세 두 가지다. 사무실과 집에서 의자를 끼고 사는 사람인지라 견제 자세라 할 수 있겠다.  





슈퍼맨과 코브라(프론) 자세다. 의자에 앉았던 꺾은선 그래프 몸이 활짝 열리는 것만으로도 좋다. 거기에다 종일 기를 펴지 못한 등과 허리,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자극되는 동작이다. 하나는 슈퍼맨이 하늘을 날듯이 엎드려서 사지를 끌어올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팔을 반대로 뒤로 뻗어 코브라가 고개 쳐들고 날면 된다. 자세가 되었으면 자극 지점에 힘을 준다. 운동하고 나서 뻐근하면 운동을 열심히 한 줄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 


이 두 동작 하고는 어깨와 종아리에 자극 오고 아프다며 보람찬 표정을 지으면 곤란하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다. 하늘을 제대로 날았다면 가슴과 무릎 이하가 바닥과 만날 일이 없다. 제대로만 하면 오징어처럼 말린 어깨와 구부정한 자세를 교정하기에 딱 이다. 아파야 할 놈을 제대로 울릴 줄 알아야 한다.     


근육은 연대성이 강한 특징이 있어 이왕 운동하는 거라면 일거양득으로 조직을 구성하면 좋다. 허리운동을 하다보면 복근까지 자극이 간다. 등 운동을 하면 옆구리까지 좋아진다. 조직의 쓴 맛만 제대로 우려낸다면 단 맛 나는 결과를 맛 볼 것이다. 조직 안에서 내 몸도 제대로 인지해야 구성원들과도 쓴 맛 단 맛이 어우러진다. 그렇게 부대끼던 직원들과 유연근무다, 재택근무다 거리를 두라 하니 ‘마음 결합조직’에 근 손실 일어날까 무섭다. 


제아무리 사회적 거리 할아버지가 와도 평소 다진 근육으로 물러터진 살은 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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