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화는 획일화될 수 없다.
미셸 푸코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에서 본 말이다. 주체화는 획일화될 수 없다. 인간은 똑같을 수가 없다. 똑같은 인간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서 DNA를 동일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살아가는 과정이 같을 수는 없다. 오늘도 내일도 모두 다른 하루다. 비슷한 하루는 있을 수 있어도 똑같은 하루는 없다. 요즘의 반 격리된 삶도 공간이 똑같을 뿐, 내 생각과 행동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이 명확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획일화했던가. 그리고 그들의 삶을 판단했던가. 학교로, 직업으로, 그들이 사는 곳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을 획일화해서 하나의 틀 안에 넣었던가. 그들을 카테고리화 하고, 이 사람은 내집단, 저 사람은 외집단으로 그렇게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새겨 넣었던가. 그들의 삶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최근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화를 볼 때도 나의 획일화는 계속되었다.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 등장인물들의 특징에서 기인한 편견, 내 안에 있는 이미지로 영화를 본다. 감독이 보여주는 이미지, 영화 속 인물의 삶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며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로 영화를 본다. 획일화하는 거다. 내 내면에서 그들을 획일화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나의 삶처럼 모두 주체이고, 그들은 나로 인해 획일화될 수 없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획일화를 하면서 살아가는가. 나는 가변적이고 앞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은 내가 봤던 이미지 하나로 획일화시켜버린다. 그들의 이미지는 내 내면에 고착화되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 원래 그렇잖아", "그런 애들은 원래 그래" 사람들을 일반화하고 분류한다. 특히나 친한 지인이 아닐 경우에는 더 그렇다. 몇 번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이미지로 남게 된다.
하지만 모든 주체는 획일화될 수 없다.. 이 명확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는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 강해진다. 이 삶에 대한 애정이.
최근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기 시작했다. 책의 초반에 이런 말이 나온다. "We grow up in isolation" 우주의 모든 별들은 격리되어 있다. 서로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격리된 지구에서 자라났다. 어쩌면 격리는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난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격리가 끝나는 날에도 지금 느끼는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 모든 주체들의 특별함을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