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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Jul 13. 2022

혹시 왼손을 사용하시면 말씀해주세요

닭콩국수

퇴근길에 종종 합정역까지 걸어가곤 했다. 배고픈 와중에 황홀한 냄새를 풍기는 고깃집들을 겨우 지나치고 나면, 우드톤의 오픈 주방에 통유리 창문으로 마감한 가게가 보였다. 며칠, 꽤 수 일이 지나도 불은 꺼져 있었으며, 문에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 안 나지만, 신메뉴를 개발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거 무슨 자신감이지? 메뉴를 개발하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여러모로 어떤 가게인지 참 궁금했다. 그러던 중 유독 낮은 입간판에 있는 가게 이름을 보았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날따라...?) 검색을 해보니, 꽤 유명한 가게였다. 리뷰들을 보니 신메뉴 개발할 시간쯤은 얼마든지 기다리고도 남을 찬양 글들이 넘치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흠... 한번 도전해볼 만 한데?'




이 가게의 메뉴는 오직 하나, 계절 면요리였다. 라멘, 소바 등 그동안 다양한 메뉴를 만들어온 듯했다. 지금 팔고 있는 메뉴는 닭콩국수였다. 평소에는 웨이팅도 많은 데다, 1일 50인분 한정이라고 해서 오전에도 매진되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타이밍을 찾았다. 바로 장마철이었다.


비가 급히 쏟아지고 그치고 하는 장마철. 이 날씨의 장점 중 하나는 생활권 맛집을 보다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날씨의 악조건을 뚫고 오는 열정 손님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웨이팅이 많이 줄어드는 편이다.


혹시나 해서 가게 인스타그램 계정을 살펴보았다. 오전 중 매진되었다는 포스팅이 없었다. 그래도 그 사이 매진이 될 수 있으니, 플랜 B로 합정역 주변의 다른 혼밥 맛집들을 몇 군데 더 찾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후보들도 더 궁금해져서, 어느 순간 처음 가게를 꼭 가지 못하더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합정역을 향해 걸었다. 비는 그렇게 많이 쏟아지지 않는 날씨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걷다가 그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이럴 수가. 통유리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게 내부에는 자리가 남아 있었고, 웨이팅도 없는 게 아닌가. 마치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것 마냥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사장님은 안쪽부터 채워 앉아달라고 안내해주셨다. 오! 나 오늘 닭콩국수 먹어볼 수 있는 건가!


자리에 앉자 사장님이 수저와 컵을 세팅해주셨다. 그리고 인상적인 한 마디.


"혹시 왼손을 사용하시면 말씀해주세요."


분명 왼손잡이를 위한 배려였다. 나중에 더 알고 보니 위생 측면에서도 공용 수저통을 놓지 않고 따로 챙겨주신다고 한다. '왼손잡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도 그 자체가 존중과 배려의 표현은 아닌 것 같아서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성을 들이다니. 음식도 기대할 만했다.


잠시 기다리니 닭콩국수가 나왔다. 맑은 기가 있는 뽀얀 닭국물에 , 닭고기 , 참외 절임, 오이채, 피망채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국물은 심심하지만 고소한 편이었고, 참외 절임은 달달했으며, 오이채에는 짭짤한 간이 되어 있었다.  같이 먹었을   조화가 상당했다. (어떤 부재료가 어떤 맛을 담당했는지 사실 정확히 기억은  나지만... 방금 표현한 맛들이 분명  있었다)


비오는 날에 드디어 만나보는구나, 닭콩국수!




나는 대단한 음식평론가도 아니고, 이렇게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을 세세하게 나열하고 따져가며 기록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 날은 음식의 맛과 사장님의 센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여러 의미가 가득한 날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궁금해했던 곳을 직접 들어가 보았으며, 운 좋게도 웨이팅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또 그곳에서 상대를 위한 배려를 느꼈고, 무엇보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고 싶지 않던 나의 어느 저녁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만족스럽게, 즐겁게 먹을 수 있다면 그 식탁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아닐까. 나는 그 행복을 계속 찾고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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