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번 역은 강남역 강남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뉴분당선은 역에 정차할 수록 사람이 많아진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으로 꽉찬 열차. 오늘은 평소보다 더 힘들다. 어제 회식한 분 옆에 서게되었다. 회식 다음날의 숙취가 느껴지는 분이었다. 뜨거운 몸과 희미한 술냄새, 힘들어 보이는 표정. 그가 내 뱉는 숨마다 느껴지는 알콜냄새와 꽉찬 사람냄새는 우울한 마음을 더 우울하게 했고, 몸은 벌써 퇴근길 상태다. 빨리 내려서 마가커피를 들러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셔야겠다고 다짐한다. 8번출구로 나가야하지만 회사 근처엔 고가커피 밖에 없다. 2021년. 그때만해도 별다방만 마셨는데 말이지. 그것도 안되면 8번 출구로 나가 진한 아트제 커피를 마셨는데 말이지. 요즘엔 매일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하는 자신의 욕구도 부담스럽다. 지수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마가커피로 향했다.
사람이 많네. 키오스크에서 빠르게 주문을 한다. 스크텔레콤을 사용하는 지라 10%할인을 받을 수 있다. 잊지 않고 키오스크에 체크를 하고 댄항공 마일리지를 모을수있는 카드를 활용해 결제를 한다. 1800원을 쓰고 있지만 할인을 챙기고, 마일리지 적립을 받으니 현명한 소비자가 아닌가 생각하며 커피를 기다린다. 시간을 버리긴 아쉬우니 경제신문을 스크롤한다.
"내 월급은 그대로인데"...'억대 연봉자' 무려 100만명 넘었다.
지난해 근로자 '평균 급여 4332만원...'억대연봉자 139만명'
국세청 통계자료에 근거한기사. 지수는 '억대연봉자'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억대연봉자라면 마치 부자인 것 처럼 바라보지만 말이좋아 억대연봉자이지 실수령액과 연말정산으로 토해내는 세금을 생각하면 억대연봉자가 의미가 있나 싶다.
억대연봉자. 그 억대연봉자가 접니다. 강남에서 일하지요. 하지만 출근하면서 별다방도 아트제도 아닌 마가 커피를 마시고요, 그러면서도 할인 적립 꼬박 챙겨요. 사실 마가 커피도 부담스러운 형편이에요. 오호호.
한숨을 푹 쉬면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8번출그를 향해 걸어갔다.
#7
나는 억대연봉자. 남편도 억대연봉자.
하지만 나는 경기도, 전세, 금융권, 워킹맘, 이과장이다. 작년에 가까스로 동기들 중 꼴지로 '과장'승진을 했다. 작년에 승진 전까지 준비해둬야하는 과장승진 전에 따야하는 금융자격증을 따느라 주말마다 아이도 보지 못하고 스터디 카페를 전전했다. 남편은 지지해주기는 커녕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하느냐고 미리 준비 하지 않았다고 타박을 줬다. 주말마다 해야하는 독박육아로 남편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만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닌데, 우리 세 식구 잘 살아보자고 이렇게 버티고 견디는 건데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실속없는 삶이 내 삶이 아닐까 싶다. 책상에 가서 커피를 내려놓으며 단전에 있는 활력을 끌어모아 웃으면서 차장님께 눈인사를 하고 옆의 동료에게 상쾌한 아침이라며 인사를 한다.
이과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늘 기분이 좋으세요? 대단하세요. 아이도 기르시면서 어떻게 매일 같이 그렇게 단정하신지!! 저도 과장님 처럼 멋진 커리어 워먼이 되고싶어요.
동료의 인사말에 지수는 고맙다며 특유의 지적인 미소를 짓고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해야할 일이 많다. 큰 건 대출을 처리해야하기에 절대절대 실수가 없어야하는 날이다.
차장님의 말씀이 들린다.
이과장, 오늘 알죠? 이번 건 실수 없어야 합니다.
#8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했다.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어 라떼마트에 들러서 유부초밥과 연어초밥을 사서 저녁를 해결하고 아이 숙제를 펼쳤다. 소마셈과 기탄은 필수다. 어떻게든 사교육비를 절약하려고 수학은 스스로 봐주고 있다. 하지만 잦은 야근과 회식, 그리고 피로는 꾸준함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게했다. 아이는 마지못해 앉아서 할당량을 채우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수학 학원에 보내야할까? 늘 걱정하는 지수다.
평소보다 일찍 온 남편은 들어오자마자 플라스틱 포장지가 널부러진 식탁을 정리하면서 한숨을 쉰다. 지수는 왠지모르게 눈치가보인다. 거실공부를 한다고 책상을 거실에 두어서 뒤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움직임과 시선이 불편하다. 아이는 오늘 따라 엄마 이거 모르겠어. 이해가 안가. 이걸 몰라. 이건 10을 더하고 1을 빼면 나오잖아. 자 한 번 해보자. 틀린 답을 쓰는 아이에게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쳤다.
이거 많이 했던 거잖아! 왜 몰라! 다시 집중해서 풀어봐!
뒤에서 지켜보던 남편 원석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지수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공부에 의미부여안해. 하고 싶을 때 하면된다고 생각하니까. 그치만 니가 그렇게 불안하면 집에서 그렇게 봐줄게 아니라 그냥 학원을 보내. 애 스트레스만 받고 수개념도 제대로 안잡히고 있잖아. 수학을 좋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부모 역할이잖아.
지수는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화가난다. '당신이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지수 내가 원하는 학원 다 보낼 수 있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말을 삼키고 내일 학원을 한번 알아보겠다고 대답하고 하던 공부를 마무리했다.
#9
지수와 원석은 20대에 만났다. 지수는 신강대 경제학과를 다녔고, 원석은 한냥대학 반도체공학과를 다녔다. 지수는 지방출신이고 가난하진 않지만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이룬 자신의 성과가 자랑스러웠다. 원석은 서울이 고향이지만 노운구에서 태어나 노운구에서 자랐다. 공무원 부모님 밑에서 노운 교육특구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랐다. 성실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둘은 비슷한 가정환경과 성실함에 편안함을 느꼈고, 연애를 하면서도 비슷한 환경 덕분인지 취향차이가 적어 큰 트러블 없이 즐거웠다. 원석은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샘성에 근무를 하게 되었고, 1년뒤 지수는 심한은행에 취직했다. 5년의 연애 상태였고 이제 남은 것은 '결혼'이었다. 둘다 독립적인 성향이고 부모님들 또한 여유가 있으신 상태가 아니었기에 둘은 3년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 결혼을 하자고 약속했다. 3년뒤 원석이 모은 1억 2천의 돈과 지수가 모은 8천만원, 총 2억원이 지수와 원석의 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