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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은 현수와 헤어지고 은행앱을 켰다. 심한 은행은 지수가 근무하니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토트뱅크에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두었다. 금리가 낮을 때 만들어서 한도도 연봉의 2배, 2억을 개설해 두었다. 가끔 통장을 활용해 공모주 청약이나 연말정산 전 세금추징이 될 것 같은 해에 성과급 나올 만큼을 계산해 연금저축펀드와 IRP 계좌에 납입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워낙 빚을 무서워하는 부모님 밑에 자란 터라 원석은 주변 동료들이 ‘빚투’를 할 때에도 통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은 원석에게 맞지 않는 계산식이었다. 적당한 리스크 적당한 수익이 좋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원석이 24평 자가를 마련할 동안 동료들은 주식과 코인으로 번 돈과 저금리를 활용해 마포, 잠실 등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때마다 한턱내는 동료들의 밥을 먹으면서 원석은 뭔가 모를 자괴감을 느꼈다. 지수에게도 유진이에게 좋은 환경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원석은 공부를 잘했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았다. 농사꾼이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듯이 원석은 공부를 하고 수확하는 주변의 인정과 존중, 권위가 좋았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언제나 원석의 좋은 태도와 좋은 성적은 주변의 칭송대상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조차 지도교수님을 잘 만나 원석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 없이 공부에 매진하며 졸업논문을 쓰고 교수님의 응원을 받으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때 교수님은 미국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본인이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아는 분을 통해서 미국에 거주할 곳도 알아봐 주시겠다며 고민해 보라고 했었다.
원석은 부모님의 경제상황을 알았다. 사업하는 큰아버지의 보증으로 수년간 모은 돈을 날렸다. 공무원 월급으로 그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엄마는 안 먹고 안 입고 아꼈다. 그 사실을 아는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형님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지면 집안이 무너지는 것이니까. 엄마는 몇 년을 마음 아파했고 다시금 아끼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원석은 그런 엄마에게 매년 수천이 드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취직을 선택했고 운 좋게도 바로 붙었다. 이후에도 원석은 그저 성실하게 개미처럼 살았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자신도 변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수와 유진이를 위해서. 특히나 유진이가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었다. 원석은 현수와 헤어지고 교부문고에 들러 부동산 투자와 관련된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나도 한 번 해보는 거야.
현수를 만나기 전 일주일 동안 원석은 구입해 온 책을 빠르게 읽어나갔고 짬짬이 부동산 블로그들의 글도 보았다. 뉴욕선구자, 책받침, 비룡, 청담동아이 등 유명한 블로그들의 글을 보면서 거시경제와 미시경제, 금리와 부동산의 상관관계등 대략적인 얼개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느낀 것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부동산이 상승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금리상태, M2 유동성과 인플레이션 등을 고려해 볼 때 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기에 내가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자산가치의 속도가 더 빨라서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현수가 말한 오피스텔을 찾아보고 관련 글들을 읽어보았다. 근처 부동산 2-3곳에 전화해 시세도 알아보았고 부동산 소장님들이 보시는 전망도 체크해 보았다. 통화한 소장님들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좋게 본다고 말했다. 강원도에서 출퇴근도 가능하고 생활권도 편리해서 하나쯤 투자용으로 가지고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원석은 확신이 들었다. 좋은 예감이 들었고, 문득 자신도 어쩌면 부동산 투자로 '잠실'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혼자 미소를 지었다.
토요일 2시까지 청량리역 앞 대박나길부동산으로 오라고 했다. 원석은 현수와 부동산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다. 현수는 원석을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고 소장님도 명함을 주시면서 현수씨 친구분이시면 투자를 많이 하셨겠네요라며 인사를 했다. 원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현수는 바로 요즘 이 동네의 상황, 매물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소장님은 요즘 분위기, 거래하려는 오피스텔이 어떤지 앞으로 전망이 어떤지 브리핑을 해주었다. 원석이 공부한 그대로였다. 원석은 떨리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는 마음으로 소장님이 준 카탈로그를 훑어보았다. 이후 현수와 소장님은 다른 지역 이야기도 나누었다. 매도를 했는데 더 올랐다. 아쉽다. 누구는 몇 개를 해서 지금 얼마를 벌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몇 개를 다시 샀다는 이야기가 주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데 원석은 어색하고 현수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소장님은 동호수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왔다.
현수씨는 어디를 하려고? 여기 여기가 RR이야. 대신 P를 줘야 하고. 여긴 별로긴 하지만 무피야.
현수는 대략적으로 훑어보더니 조금 비싸더라도 RR이 매도할 때 낫다면서 원석에게 권했다. 원석은 어떤 것이 RR인지 까지 알지 못해서 현수와 소장님의 말대로 좋은 매물이라는 말에 하나를 골랐다. 현수는 원래 생각해 둔 매물이 있었는데 어제 접수된 매물이 있어 두 개 중 하나를 고민했다. 한 시간쯤 이야길 나눈 뒤에 현수와 원석은 각각 매도자에게 500만 원의 계약금을 보냈고 계약서 쓰는 날짜를 정하고 부동산을 나왔다.
원석은 이렇게 쉽게 거래하는 현수가 놀라웠고, 자신도 이런 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편으론 생각보다 비싸게 느껴지는 가격에 걱정이 되었다. 이 가격에 나라면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텐데... 이런 마음이 들었다. 현수는 생각에 잠긴 원석을 툭치며
무슨 생각하냐? 제수 씨 생각? 걱정하지 마. 여기 내가 많이 알아봤고 아까 본 소장님 부동산 투자 고수야. 전해 듣기론 투자로 성공해서 꼬빌도 하나 가지고 계시다고 하더라. 정 신경 쓰이면 좀 가지고 있다가 오르면 매도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배고프지 않아? 우리 오랜만에 치킨에 맥주 한잔하고 헤어질까? 시간 괜찮아?
원석은 자신의 소심함을 현수가 알아차린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만 현수가 해준 말들에 안심이 되었다. 현수와 원석은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앞으로 어떻게 이 지역이 바뀔지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되었을 때 집값은 어떻게 될 것이라는 현수의 말에 원석은 기분이 들떴다. 지수에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돈을 벌어서 34평 이사에 보탬이 된다면 좋아할 것이다. 원석은 1년 뒤쯤 매도를 생각하고서 매달 낼 신용대출 이자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오늘 계약을 하면서 걱정도 많이 하고 신경도 많이 썼던 터리 두통이 있었는데 맥주를 한 잔 마시니 두통을 잊을 수 있었다. 현수와 이런저런 이야길 하면서 잔에 채워진 맥주를 한 번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