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38PM
오랜만에 전화온 혜리와 한 시간여를 통화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아이를 같은 줄넘기학원에 보내는터라 이번 줄넘기 대회 참여 여부로 시작된 대화는 수학학원, 영어학원, 워킹맘의 육아, 사교육 전반으로 이어졌다. 끝없는 수다에 아이는 침대에서 놀다 지쳐 졸린다고 했다. 지수는 아차 싶어 통화 시간을 보니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기 전 혜리가 아영이 이야기를 했다.
너 아영이 기억나? 내가 좋아했던 애가 걔 좋아했었잖아.
아! 아영이 알지. 나 아영이랑 친했었어.
걔 이번에 목동이사간다더라. 근데 그 집이 50억이래. 대단하지?
와~ 정말? 대단하다. 근데 아영인 잘 될 것 같았어. 똑똑하고 끈기도 있었고, 목표의식도 있었지.
통화를 마무리하고 아영이의 소식을 들은 지수는 자신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우울해졌다. 아영을 질투하는 마음보단 자신이 살아오면서 주어진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후회와 자신의 힘든 상황에서 오는 우울이었다.
#2
11:30PM
한숨이 나왔다. 옆에 잠든 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어보며 잠들어 보려고 했지만 쉬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낮에 읽던 소설을 읽어본다. 힘든 상황에 처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이렇게 힘든데도 열심히 살아가네? 라는 마음이 들다가도 지금 이런 책을 읽을 때가 아닌데. 가슴이 답답했다.
#3
겨우 잠이 들었던 터라 피곤했지만 운동복을 갈아입고 아 파트 헬스장에 갔다. 그동안 관리하지 않았던 몸은 올해들어 갑작스레 외형을 달리했다. 그토록 싫어하던 ‘흘러내리는 혹은 무너저내린’ 아줌마가 되고야 말았다. 더이상은 자신을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짧은 시간이라도 운동을 해야지 다짐한지 한 달째다. 살은 빠지지 않지만 확실히 우울감이 덜해졌다.
트레이드 밀을 걸으면서 어젯밤 대화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동창인 아영이는 지수를 좋아했다. 지수도 아영이가 좋았다. 공부도 잘하고 예뻤지만 털털한 성격을 가진 아영이었다. 둘은 잘 맞았고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지수에게는 영미가 있었다. 중학교때부터 절친인 영미는 아영이를 싫어했다. 지수는 영미의 화와 슬퍼함이 마음이파서 아영이와 놀지 않았다. 미안함과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자 고등학생의 치기어린 우정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영미와 지수는 이제 절친이 아니다. 지난 세월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지수는 절친이라는 이름하에 영미가 요구하는 이기적인 일들을 수년간 들어주었다. 지수는 자신의 순진함을 후회하고 있다. 영미의 무리한 요구들과 일방적인 관계의 규칙들을 떠올리면서 그때 영미 대신 아영이와 친하게 지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은 주변인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아영이와 친하게 지냈다면, 그녀와 교류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4
지수는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했다. 남편과 아이가 먹을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두고 아이를 깨웠다. 아이를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히면서 스치는 행복을 느낀다. 자신에게 주어진 보물. 그래 이 아이만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뭐가 문제일까. 머릿속을 부유하는 여러 생각들을 흩어버리고 아이에게 집중했다.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 준뒤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학교에서 역까지 걸어가면서 학교 바로 옆인 리편한세상에 전세를 구할 걸 그랬나 하는 - 거의 매일 하고 있는 -생각을 한다. 지수가 사는 라떼캐슬은 역과 마트를 끼고 있고 지수가 근무하고 있는 강남역까지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뉴분당선을 끼고 있는 아파트다. 학교옆 리편한세상과 고민하다 지하철 역 바로 앞인 라떼캐슬에 전세를 얻었다. 아무래도 야근을 자주 하는 남편과 자신이 퇴근 후 집에 오는 것을 고려해서 고른 집이다. 학교만 데려다 주면 학교마친 뒤엔 학원에서 데려다주니 그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 것 같았다. 이어서 떠오른 생각은 몇달 뒤면 벌써 전세만기가 다가온다는 것. 집주인이 들어온다고 하면 어쩌지? 지수가 전세를 구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아파트 시세도 전세가도 올랐다. 더이상 돈을 융통할 길이 없는 지수는 출근길이 답답했다.
#5
지하철에 탔다. 역시나 오늘도 사람이 많다. 핸드백을 앞으로 돌려 메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휴대폰 진동을 느꼈다. 메시지를 확인 했다. 25일, 월급날 가장먼저 빠져나가는 것은 대출이자다. 대출이자가 빠져나가는 메시지였다. 무서운 것들이란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다니는 심한은행에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래 다 돌고 도는거지.
아영이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20년의 시간동안 아영이는 어떻게 살았기에 저런 결과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걸까? 어디서부터 잘 못 산 것일까? 마음이 괴롭고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