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면 안되는데
지난 주말에는 참여하고 있는 합창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20대에 교사를 하면서 목을 크게 베려버린 이후로 목 상태는 꾸준히 나빠져서, 요즈음에는 이전의 4분의 1도 나오질 않아요. 토/일 공연이였는데 가뜩이나 망가진 목구멍이 컨디션 난조로 더 나빠지면서, 리허설/공연을 제외하고는 아예 말도 하지 않고 목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왔더랬습니다.
샌프란에서 시누의 행사도 있고 제 공연도 볼겸 겸사겸사 모여주신 남편 식구 쪽에 이런 저런 모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을 아끼느라 다 불참할 수 밖에 없었어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아빠랑 아빠 친구랑 하이킹을 나간 남편을 뒤로하고, 전날 밤 열시에 끝난 리허설로 피곤한 몸을 밍기적밍기적 거리다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나면 슈퍼 빵순이는 언제 또 올 지 모르는 빵의 기회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죠.
남편과 데이트 할 적 부터 제가 가장 좋아하던 레스토랑이 하나 있습니다. 'Octavia'라고 하는 고급 레스토랑인데요, 캘리포니아 퀴진을 주로 다룹니다. 미슐랭 1스타를 가지고 있어 예약하기가 쉽지 않았었는데, 판데믹을 버텨내면서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여전히 예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로 제 생일이나 기념일,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미리 예약해서 가는 편입니다. 가족이 방문했을 때도 같이 갔었는데, 엄마 아빠도 언니도 모두 엄청 좋아하셨어요.
자, 그런 옥타비아에서 갑자기 토요일에 팝업 베이커리를 열겠다고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려놨습니다. 남편이 찾아냈는데, 본인은 일정이 있어 못 간다고 아쉬워했죠. 아침 10시에 판매 시작해서 다 팔릴 때 까지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건 먹어야해
본능이 깨워 눈꼽만 떼고 부랴부랴 도착했는데, 아뿔싸.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줄이 깁니다.
코너를 돌아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날씨가 좋길래 옷을 얇게 입고 나갔는데 아직 해가 다 머리위로 안 올라와서 그늘이라 춥더라고요. 10시가 지났는데 당최 줄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고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지 미국인 특유의 쓸데없는 안부를 물어제끼는 건지.
설상가상으로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일행이 동참하면서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분명히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친구가 조인하고, 친구의 남친도 오고 막 이런 식으로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줄이냐고 묻고 줄에 동참합니다.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와 졸지에 얘기를 나눕니다. 아주머니 말로는 저번 달인가에도 한 번 하고 이번이 두 번째라는데, 그 때는 못 사서 이번에는 사셔야겠답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일행이 앞으로 가서 줄의 진행사항을 보고 오고는 "우리는 안전한데 뒤에 사람들은 못 살수도 있겠어" 합니다.
앞에서 서너명의 사람들이 끌차에 예쁜 장미꽃을 한가득 싣고 서 있었어요. "어떤 똑똑한 이가 여기서 꽃 팔 생각을 하다니 천재잖아"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만 보니 프로모션입니다. 새로 나온 데이트나잇 (커플/결혼한 커플이 아이가 있으면 아이 맡겨놓고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데이트) 앱이라고, 간단히 설명을 해 주면서 꽃을 주길래 저도 졸지에 받았습니다. 줄이 긴데 기분이 좀 풀리더라구요. 사람들 참 똑똑합니다.
50분이 지났습니다. 이제 막 저도 코너를 돌았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한가득 빵을 들고 걸어나오고 있었어요. 앗, 내 빵..
점원 한 분이 걸어나오면서 걸려있는 메뉴에 선을 긋고 지나갑니다. 앗, 안돼! 기본 크로와상이 다 팔린 모양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키친에서 계속 새로이 구운 빵이 나오고 있습니다. 빵 가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토드백도 팔고있었는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하마터면 충동구매할 뻔 했어요.
기다린지 1시간 10여분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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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 사람은 쿨하게 "전부 다 주세요"를 시전하였습니다. 오늘 들어본 말 중 가잘 멋진 말입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크로와상 빼고는 아직 모두 살아있습니다.
저는 한 시간 십여분동안 속으로 되뇌이던 메뉴를 빠르게 내뱉습니다. 줄이 기니 스피드가 생명.
"스트로베리 크림 도넛이랑, 블루벨 허니 스콘이랑, 캬라멜라이즈드 어니언 허니 멍키브레드랑, 사워도우브레드랑, 아스파라거스 리코타 페이스트리도 주세요"
이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순간 커피도 마실까 고민을 하는데, 보아하니 어디서 커피를 내려주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컵을 주더라고요?
"커피는 그냥 저기 있는 병에서 따라마시는 건가요?"
"네"
그냥 미리 내린 걸 주는 거면 뭐 먹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잊어버린 건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빠르게 결제를 하고 빵을 받아 나옵니다. 감격스럽게 빵을 받아 나왔는데,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픽업을 해줬습니다. 빵 샀다고 자랑을 합니다.
생각해보니 시누를 주려고 올리브오일 케이크를 사려고 했는데 주문할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잊어버렸습니다. 어째 뭘 까먹은 것 같더라니.. 뭐, 그건 레스토랑 디저트 메뉴에도 자주 있는 거니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집에 와서 같이 먹고 싶었는데 남편은 샤워를 하고 얼른 나가봐야합니다. 쫄쫄 굶은 저는 그냥 혼자서라도 먹기로 했어요. 먼저 멍키브레드 입니다. 커피를 한잔 빠르게 내렸습니다.
아 영롱하다 영롱해.
밑면까지 얼마나 잘 구워졌는지 노릇노릇 합니다. 페이스트리가 이미 조각나 있어 쉽게 한입 크기로 떨어져 나옵니다. 카라멜라이징한 양파와 꿀이 합쳐져 기분좋게 달큰하고, 치즈가 짭조름한데, 페이스트리가 아삭하고 촉촉하고 고소합니다. 아,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조합.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천상의 맛입니다.
순식간에 다 먹을 뻔 했는데 가까스로 이성을 찾고 남편이 맛 보도록 두 입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스트로베리 크림 도넛을 맛보도록 하죠.
뜯어보는데 크림이 너무 조금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조금이요. 에이씨 갑자기 괜히 샀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일단 크림이 있는 쪽으로 한 입 베어물었습니다.
엇
맛있습니다. 크림은 한 없이 가볍고 은은하게 달면서 생딸기의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도넛 속 크림에서 딸기의 신선함을 논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분명히 튀긴 빵인데 느끼하지 않고 산뜻합니다. 아아아, 내가 감히 의심을 했다니, 급히 반성을 했습니다. 그래도 크림은 너무 조금 들었어요.. 좀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저 크림만 병으로 팔아도 퍼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남편을 붙잡고 내가 맛보기를 남겨놨다며 생색을 냈습니다. 입이나 벌려보라며 멍키브레드를 한 입 넣어줍니다.
꼭꼭 씹는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해집니다. 만화 캐릭터처럼요ㅋㅋㅋ 세상에 너무 맛있다며 난리를 칩니다. 뒤이어 도넛도 한 입. 눈이 풀립니다. 탈탈털어 마지막 남은 멍키브레드 한 입을 더 줍니다. 굉장히 좋아했어요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는 서둘러 나갑니다. 늦었어요.
남편이 나간 사이 사워브레드를 정리하도록 합니다.
과장 없이 제 머리통 만 합니다. 여기 이 빵은 맛있어서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무조건 시켜먹어요. 저렇게 커다란데 10불밖에 안 하니, 한국 빵 가격으로 따지자면 가성비가 좋지 않나 싶습니다.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잘라서 소분해가지고 얼립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물, 밀가루, 소금으로만 만든 식사빵입니다. 사워도우 특유의 꼭꼭 씹으면 구수하고 새콤한 커피의 향내가 사르르 납니다. 버터를 발라서 한 입 먹으면 환상이죠. 잘라 넣다가 한 입 먹고야 말았습니다.
아직 블루베리허니스콘과 아스파라거스 페이스트리가 남았습니다. 남편이 가고 혼자 먹을까 하다가 남겨두었어요. 내일 아침에 같이 먹을 예정입니다.
또 언제 세터베이크(Satur-토요일 / bake 굽다)를 열 지 모르겠는데, 반드시 또 갑니다. 옷을 좀 더 두껍게 입고 조금 더 일찍 가야겠어요.
글을 다 쓰고 났는데 조금 후회를 하는 중입니다. 너무 소문나서 줄이 더 길어지면 안되는데요 ㅠㅠㅠㅠ 내 빵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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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쟁자가 더 늘어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