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에세이 <삶은 계란이다> 3화
인터넷 서점에서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하다, 마음에 끌리는 신간 몇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재를 하려고 담아 놓은 책들을 살펴보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모두 상실에 관련된 도서였다. 엄마 기일이 돌아오니, 엄마 잃은 슬픔이 깊어져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는 대로 보인다고 하더니.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그랬다. 집밖에 나가면 엄마 연배의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많은지. 멍하니 바라보다 엄마 생각에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요즘 방송을 손꼽아 기다리는 드라마가 한 편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다. 방영 전부터 애순 역의 아이유와 관식 역의 박보검 주연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애순과 관식의 일대기와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인생을 그렸다. 울다가 웃다가 눈물 콧물 웃음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드라마다. 특히 애순 엄마 광례역을 맡은 염혜란 배우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눈물 콧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광례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친가에서 자라는 딸 애순이 늘 그립지만 애써 그 마음을 감추며 살다 짧은 생을 마친다.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뜻이 "완전히 속았다"인줄 알았다. 사실은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제주도 방언이었다. 그럼에도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내게는 "인생에 완전히 속았습니다"라는 생각이 그치질 않았다. 경험한 만큼이 자신의 세상이라고 했던가? 20대에는 청춘 이야기가, 30대에는 육아와 자녀교육 이야기가 온통 내 관심사였다. 40대가 되니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였던 것처럼 책이나 영화, 드라마 속 부모 이야기가 온통 내 인생을 대변하는 듯 느껴져 무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부모가 되어 20년 넘게 살아보니 자식으로만 살 때는 몰랐던 내 부모의 인생이 조금씩 보인다. 자식일 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원망이 부모 입장에 서니 ‘속상했겠구나, 고단했겠네!’ 위로로 변한다. 부모로서 그들이 느꼈을 삶의 무게와 아픔을 백분지 일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자식 낳아서 키워보라”는 말이 있나보다. 서른 넘은 딸이 힘들까봐 항암 치료 와중에도 대신 육아를 도맡아야 편했던 엄마의 그 한없는 사랑을. 자식 바라기로 살았던 아빠의 외로움을.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신의 속까지 다 파내어 주고도 늘 부족해서 미안하다던 그 따뜻한 볕이 지고 나서야.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보다 나를 더 아껴준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준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 자식한테 주는 사랑을 100분의 1만이라도 더 부모에게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시린 마음을 조금은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지 않았을까. 가슴을 후벼 파는 듯 저리고 돌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먹먹한 슬픔이 조금은 덜 하지 않았을까.
부모 잃은 어리석은 자식에게 남는 것은 태산 같은 후회뿐이다. 내 인생도 어느새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부모가 된 탓에 자신의 인생을 자식에게 몽땅 바친 그들에게 다시 만나는 날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폭삭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