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바쁨에 취해요
서울, 대학교 술자리.
딸기 요거트 막걸리 같은 건 참 기억에 남는다. 달큰 새콤해 정말 맛있었다. 어떤 학우들은 수업에 들어가면서 음료수인 척 그 막걸리를 포장해 마신다고 할 정도였다.
한 병에 팔천 원이었던가. 음료처럼 술술 넘어가 사라져 버리니 (내 기준) 저렴한 건 아니었고 그리 즐기진 않았었다.
한 번은 단편 영화 촬영이 끝나고 학우들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누군가 실수로 딸기 요거트 막걸리 유리병을 깨뜨렸다. 와장창! 바닥에 파편이 흩어지고, 저 멀리 있는 손님의 롱패딩에도 하얀 방울이 묻고, 진땀을 뺐었다. 자리에는 죄송함과 당황감이 번졌었지만.
멀리 온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인상적인 추억이다.
서울, 일자리 회식 때는.
비싼 횟집을 주로 갔었다. 경청을 기본으로 깔며 조금 불편하게 안주를 삼켰었다. 감사하고 유익한 일 얘기일지라도 '네, 네, 좋습니다, 좋아요'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나에게는 살짝 맞지 않는 퍼즐 조각 같았다. "라떼는 말이야~"도 실제로 들어봤고, "역시 MZ는 술을 잘 빼." "글쓴이가 술을 많이 안 마셔서 서운하네?" 소리도 들어봤다.
이 또한 지나 보면 유쾌한 체험장이었지.
이제 시골, 술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근래 2년간 여기서 술을 입에 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술집도 몇 개 없고, 술을 나눌 사람들도 만나지 않는다. 청춘이라고 취해서 돌아다닐 흥도 떠나보냈다.
왜 이런 체질로 바뀌었나.
생산적인 일을 더 좋아하는 성향이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몇 년 전에야 확실히 자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 추구형은 아니었고, 살다 보니 나의 틀을 찾은 것 같다.
물론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 막 입맞춤을 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노는 것보다는 좋아한다. 지나고 나면 보람이 크게 남아서 그런지.
아무튼.
예전에는 술에 취하고 싶어 했다면, 지금은 시골의 감성과 바쁨에 취한다.
아침부터 바쁨이 스타트건을 쏜다.
연회색 문을 열고 나간다.
지긋한 시골의 녹색 감성 속에서 활기찬 하루를 시작한다.
1. 글 쓰기. 본업. 서울에 계신 피디님과 메일로 소통을 주고받는다. 냉철한 피드백에 손과 머리가 지끈지끈! 시골 풍경 한번 쳐다보고, 노트북 화면 쳐다보고, 손가락에 모터를 달고 글자를 적어댄다.
2. 영상 찍기. 엄마에게 식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영상으로 담아 편집하고, 시골 풍경과 소리를 담아서 또 편집한다.
3. 땅과 만나는 밭일. 부모님께서 종종 부탁하신다. 최근에는 잔디를 심었다. 이때 동생과 냉전 중이었던지라 말 한마디 안 하고 땀 흘리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잔디를 흙 사이로 질서 있게 묻고 물을 뿌리는 작업이었다.
4. 떡 만들기. 부모님께서 떡을 연구 중이시다. 보조하고 영상으로 기록한다. 정리하던 내가 주걱을 강하게 털어버렸고 떡고물이 사방으로 튀어버린 실수도 있었다.
5. 집안일. 쓰레기 버리기, 빨래 널기, 설거지.
6. 가게 기획. 부모님께서 여름 장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메뉴를 고민 중이다. 나는 브리핑을 좋아해서 PPT와 기획 자료를 준비한다. 비품을 정하고 예산을 짜고 구입할 물품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7. 틈틈이 도서관 도장을 찍는다. 책의 글귀를 눈에 담으며 속으로 감탄사 연발.
"캬, 이 시 뭐야? 미쳤잖아?"
8. SNS로 부모님 일 홍보도 한다.
9. 산책하기. 시골 공기를 마시면서 1시간은 걸어야지, 건강에 좋다!
기존에 일했던 드라마 시나리오 집필, 영화 촬영 등을 다시 잡을 수 있게끔 훗날의 미래를 기획하는 것까지.
이윽고 기운을 탕진한 밤이 되면,
내 체크리스트가 알차게 채워진 것에 안도하고 다음 일과를 그리며 꿀 같은 잠을 맞는다.
물론.
어떻게 좋다고만 할 수 있나.
가진 멘탈의 강도에 비해 힘들어서 울기도 하고, 성과나 결과가 더디면 하염없이 한숨이 나오고, 짧은 순간 빈둥댈 때도 있고, 귀찮음이 수영장의 물처럼 찰랑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꽤 보람찬걸.
"난 일을 좋아해. 술을 먹는 것에도 힘듦이 있고, 일하는 것에도 힘듦이 있지만 후자의 '취함'을 내가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일은 불안하지 않게 해 주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성취감을 안겨주니까.
서울의 딸기 요거트 막걸리도 좋지만, 요즈음의 빡빡한 시골 스케줄이 취할 정도로 좋다.
"아- 달다!"
#. 오늘의 드라마 명대사 <무빙>
"취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일이 힘들어? 현장이 그리워?"
"아무 쓸모가 없어진 기분이야."
"넌 나의 쓸모야. 왜 무슨 걱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