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거북 (2) - 석관(1)
고려시대의 ‘석관묘(石棺墓)’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장묘(火葬墓)로 바뀌면서 생겨났다.
그렇지만 고려시대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크게 유행하였는데,
도교와 관련된 '사신'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고려사』와 묘지를 대지(大地)의 신(神)으로부터 구입할 때 쓰는, 토지 매매 계약서인 ‘매지권(買地券)’이다.
『고려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둘째,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의 순역(順逆)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地德)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祚業)이 길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데,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公侯)·후비(后妃)·조신(朝臣)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 말에 다투어 사원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매지권'은 백제 무령왕릉의 매지권으로 이 매지권으로 인하여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임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 시대는 물론 백제시대에도 도교가 성행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점의 '매지권'이 발견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1141년(인종 19)에 만들어진 고려 현화사(玄花寺) 주지 '천상(闡祥)'의 '매지권'과 1143년에 만들어진 고려 송천사(松川寺) 주지 '세현(世賢)'의 '매지권'이 있다.
“흥왕사(興王寺)와 가까이 있는 송천사 주지인 묘능삼중대사(妙能三重大使) 세현이 죽었다-중략-동쪽으로는 청룡에 이르고, 남으로는 주작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백호에 이르며, 북쪽은 현무에 이른다-중략-보증인은 장육(張陸)과 이종도(李定度)이며, 지견인(知見忍)은 동왕공(東王公)과 서왕모(西王母)이며-중략-율령처럼 지체 없이 시행하라.”
위의 내용은 다시 한번 설명하면,
송천사 주지 세현이 죽어, 동쪽으로 청룡, 남쪽으로 주작, 서쪽으로 백호, 북쪽으로 현무가 지키고 있는 곳을 세현의 묘지터로 샀다. 이 때 이 중개의 보증인으로는 신선인 장육과 이종도였고 지견인, 즉 동석인은 동왕공와 서왕모였다는 이야기이다.
불교를 받드는 절의 주지스님과 도교의 사신과 신선, 도교에서 최고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동왕공과 서왕모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도교의 성행과 함께 '불교'와 '도교'가 서로 적대시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 윈윈한 상생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관’에도 도교의 영향을 알 수 있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석관은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것으로,
석관의 구조는 상하, 사방, 6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문(無紋)’이거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석관의 뚜껑 바깥면에 비천과 꽃을 , 안쪽 면에는 카시오페이아와 북두칠성을 새겼다.
문양이 있는 4개의 측면 벽석 외면에 ‘십이지신’과 ‘사신’이 새겨졌는데, 아마도 이 ‘사신’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방위 별로 수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석관의 안쪽 면에는 꽃과 꽃병을 새겨넣었다.
‘석관’에서 ‘사신문’은 북쪽 ‘현무’를 시작으로 청룡, 주작, 백호를 보는 방향으로 통일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 석관의 ‘사신문(四神紋)’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처럼 섬세하지 않다.
그것은 돌(石)이라는 재료의 단단함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신도>가 도식화되면서 나타난 경향으로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