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슬비 May 11. 2023

민화 속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 이야기 (24)

『흉례에 관한 의궤』에 묘사된 '거북(현무)' 도상(1)

     우리나라에서 처음 ‘거북’ 도상이 등장하는 것은 선사시대에 그려진 울주 반구대 암각화로, 세 마리의 거북이 고래 떼를 앞에서 인도하는 듯한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대인들에게도 ‘거북’은 신성시되었고, 친숙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백제, 고려의 고분벽화와 ‘석관’, 조선 전기의 ‘노회신 벽화분’까지 ‘현무’의 도상은 꾸준하게 맥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거북’ 도상은 특히 고려시대에는 동경(銅鏡)과 금속 장신구와 같은 공예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회화면에서는 벽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거북’ 도상은 조선시대에 와서 먼저 왕실의 ‘흉례(凶禮)’와 관련된 『의궤』에서 찾을 수 있다.

‘거북’은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현무’의 모습으로 『의궤』의 '찬궁(欑宮)'에 그려 붙여졌다.


     찬궁(欑宮)은  빈전(殯殿) 안에 가래나무로 만든 국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넣은 재궁(梓宮)을 모시는 나무 상자로, 4면에 각 방위에 맞는  <사수도(四獸圖)>  를 그려 붙였다.

     '사신'을 '사수', '사령'이라고도 부른다고는 것을 앞에서 몇차례 언급했었다.


     '찬궁'과 <사수도>에 대한 언급은 『세종실록』에서 처음 나오는데,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기해(1419) 12.22(임진)의 기록을 보면,


     ‘찬궁(欑宮)의 남쪽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계하기를(就攢宮南, 北向跪啓曰)’


이라는 내용에서 '찬궁'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16권, 세종 4년 임인(1422) 5.14(경오),

     ‘주작(朱雀)·현무(玄武)·청룡·백호를 사면에 그려 붙이고(次以朱雀、玄武、靑龍、白虎帖四面)’


   『세종실록』113권, 세종 28년 병인(1446) 7.19(을유),

    ‘그 천상(天上)의 밖과 사면의 벽(壁)에는 모두 분을 칠하여 바탕으로 삼고, 격석 창 밑에는 백호를 그

     리고, 북우석(北隅石)에는 현무를 그리고, 방석(傍石)에는 청룡을 그리고, 문비 양석(門扉兩石)에는

     주작을 그리는데, 백호와 청룡은 머리가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현무와 주작은 머리가 서쪽으로 향하

     게 한다

     (隔石窓下畫白虎, 北隅石畫玄武, 旁石畫靑龍,

      門扉兩石畫朱雀。白虎靑龍頭向南, 玄武朱雀

     頭向西).’


라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 초기에도 찬궁에 <사수도>를 그려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의 전말(前末)에 대한 보고서를 편찬하여 만든 책으로,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해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오례(五禮)'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 여기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가 행사가 끝나면 즉시 ‘의궤청’을 설치하여 『의궤』를 만들었다.


     ※ 길례(吉禮)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 의식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편재되어 있다.

그리고 주현(州縣)까지 길례 운영을 보여주는 「제주현명산대천의(祭州縣名山大川儀)」·「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등의 의식과 관료나 일반 백성의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大夫士庶人四仲月時享儀)」가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세계관과 사대교린의 명분하에 원구제가 빠져있지만,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논리를 예론으로 밝히기 위하여, 역대왕조의 시조신에 주목하는 등 길례의 전체적인 항목 구성은 왕실 중심의 의례에서 양반 관료들의 의례까지 포함하고 있다.


    ※ 가례(嘉禮)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세자·왕녀·종친·과거·사신·외관 등에 관한 가례 절차와 의식을  기술하고 있다.


    ※ 빈례(賓禮)  

중국과 일본, 유구(琉球) 등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사대교린의 의식이 기술되어 있다


    ※ 군례(軍禮)

의례적인 면만을 구현하는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대열의(大閱儀)」·「강무의(講 儀)」등의 군사의식과 「구일식의(救日食儀)」·「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가 기술되어 있다.


    ※ 흉례(凶禮)  

「위황제거애의(爲皇帝擧哀儀)」등 중국의 국휼(國恤)에 대한 조선조의 의식과 국왕 이하 궁중의 상장례(喪葬禮)의 절차가 편재되어 있고, 그 밖에 관료와 일반 백성의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가 기술되어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1474년(성종 5년)에 간행되어 국가 의례의 준칙을 확정하고, 이를 국

가와 사회질서 확립의 연간으로 삼았으며, 흉례는 국가 또는 왕실의 상장례(喪葬禮) 의식과 절차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국왕과 왕비가 승하했을 때 흉례를 '국장(國葬)',

    세자나 세자빈의 흉례를 '예장(禮葬)',

    국왕과 왕비의 시신과 혼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혼전(魂殿)',

    세자나 세자빈을 모신 곳을 '빈궁(殯宮)'· '혼궁(魂宮)',

    국왕과 왕비의 능은 '산릉(山)',

    세자나 세자빈, 세손의 경우는 '묘소(墓所)', '원소(園所)'라고 하였다


  『의궤』는 동일한 내용을 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御覽用)’과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하여 제작하였는데, ‘어람용’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하였기 때문에 ‘분상용’과 비교했을 때, 종이와 표지, 그림의 수준 등 그 형태와 재질, 제작기법 등에서 매우 우수하였다.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현전하는 『의궤』는 모두 17세기 이후의 『의궤』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거북’ 도상 또한 17세기 이후 ‘흉례’ 관련 『의궤』(이하 『의궤』)의 찬궁의 사방 벽에 그려 붙였던 <사수도(四獸圖)> 중에서 ‘현무’를 대상으로 한다.


     <사수도>의 모습은 주로 『산릉도감의궤』에서 나타나지만, 『예장도감의궤』, 『원소도감의궤』, 『빈전도감의궤』 등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소장처별로 ‘현무’가 수록된 『의궤』의 종류를 보면,  


    규장각은 26개의 소장 中, 『산릉도감의궤』 21개, 『원소도감의궤』3개, 『예장도감의궤』 1개,

  『봉릉도감의궤』1개를 소장하고 있으며,


    외규장각은 『산릉도감의궤』13개, 『봉릉도감의궤』1개, 『원소도감의궤』2개,

   『빈궁혼궁도감의궤』2개, 『빈전혼전도감의궤』 1개로 모두 19개를 소장하고 있고,


    장서각은 『산릉도감의궤』16개, 『봉릉도감의궤』1개, 『도감의궤』1개 모두 18개를 소장하여,


    이 세 소장처가 가진 『의궤』에서 총 63개의 ‘현무’ 도상을 찾을 수 있었다.

<소장처별 『의궤』 수량>
<소장처별 『의궤』 종류 및 수량>

     필자가 논문을 쓸 당시에는 소장처별로 <사수도>가 그려진 53개의 『의궤』를 찾았으며, 논문을 마친 후에 10개의 『의궤』를 더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찾아낸 10개의 '거북(현무)' 도상이 필자의 논문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상의 변화가 없어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였다.


     아마도 아직도 필자가 찾지못한  <사수도>가 그려진『의궤』가 더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이것은 필자의 숙제이기도 하고 추후 '거북(현무) 도상' 관련 논문을 쓰거나, 혹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숙제라고도 생각한다.


   『의궤』는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까지도 꾸준히 제작되어 ‘거북’ 도상의 변화를 연대별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 회화와 ‘민화’의 대부분은 제작자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편년을 가늠하기가 무척 어렵다.


      민화에 묘사된 ‘거북’ 도상의 연구에 있어서 편년의 문제가 항상 대두되고 있다.

 

      이 편년의 문제를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의궤』를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조선 왕실의 기록인 『의궤』는 편년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의궤』에 묘사된 ‘거북(현무)’의 도상 분석은 ‘거북’ 도상의 편년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구였다고 본다.


    이것은 조선시대 ‘궁중 회화’와 ‘민화’에 묘사된 ‘거북’ 도상의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므로, 필자의 논문을 위해서는 꼭 선행되어야 할 연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기록화인 『의궤』에 묘사된 ‘거북’ 도상을 1627년(인조 5년) 『원종예장도감의궤』에서부터 마지막 의궤인 1926년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까지 『의궤』속에 나타난 63개의 ‘거북’ 도상을 중심으로 비교˙분석하였다.  


       아래  <그림>은 1800년 제작된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수록된 <찬궁도>와 찬궁 안에 각 방위 별로 그려 붙여진 <사수도>를 형상화하여 이해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조건릉산릉 도감의궤』의 찬궁도와 사수도>



 

작가의 이전글 민화 속의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 이야기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