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개념 및 발생 배경
‘민화(民畵)’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로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 전람회에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공예'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란 의미에서 ‘민화’라고 하였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게티즈버그 연설 :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험 링컨(1809-1865)이 1863년 1.1일 '노예해방 선언'을
선포하면서, 미국 북부와 남부지역 간의 벌어진 전쟁(남북전쟁) 시 북부군이 대승을 거둔 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이다. 1863년 11.19일 전투 후 마련된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
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한다'로 연설이 끝이 난다.
그리고 1959년 8월, '민예'지에 「불가사의한 조선의 민화」라는 논문의 삽화 해설에서 조선 후기에 그려진 소위 ‘속화(俗畫)’라고 불리는 그림을 ‘민화’라고 불렀다.
또한 '조선의 민화'라는 책에서는 조선 회화를 ‘정통 회화’와 ‘비정통 회화’로 나누고, ‘정통 회화’는 예술가로서의 화가의 작품을 말하고 ‘비정통 회화’는 대부분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무명 화가나 떠돌이 화가가 그린 그림들을 지칭하며, 서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이나 관습 등과 연관이 많은 것 같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속화’와 같은 개념으로 외국에서는 ‘Native Painting’, ‘Folkart Painting’, ‘Innocent Painting’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민속화’라는 의미로 대중적인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조자용'은 한국의 모든 회화를 ‘한화(韓畵)’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였다.
'김호연'은 민화를 ‘겨레 그림’이라고 불렀고, ‘우리 겨레의 미의식과 정서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옛 그림’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철순'은 ‘한국 회화사의 주류에서 벗어난 비전문적인 화공 장인들이 일반 서민층의 그림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멋대로 그린 어수룩하고 소박하고 꾸밈없는 허드레 그림, 그리고 대단치 않은 그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정병모'는 그의 저서에서 민화의 현대적 의미를 담아, 행복을 주는 그림이라 하여 ‘행복화(幸福畵)’라고 하였고, 행복화의 전통적인 의미로 ‘길상화(吉祥畵)’라는 용어를 이야기하고 있다. ‘민화’의 현대적 의미를 잘 나타내는 용어라고 생각되며, 그동안 학자들이 ‘민화’의 개념과 용어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화’라는 용어가 이미 대중에게 알려지고 각인되어 있어서, 지금까지도 ‘민화’라는 용어를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민화의 생성이나 발전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를 살펴보아야만 그 기저에 깔린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초기 유교 중심의 삶에서 16세기, 17세기 왜란과 호란의 양 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방면에서 문화충격(文化衝擊)을 받고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근대 과학과 사상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면서, 실학(實學) 사상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의 근간(根幹)이었던 양반제가 흔들리게 된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일반 백성과 다름없는 몰락한 양반이 생겨났고, 실학사상을 통해 얻은 농업 기술로 높아진 생산성과 이렇게 생산된 물품을 유통하기 위한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몰락한 양반과 부자가 된 상민(常民)이 나오는 등 조선 후기의 사회는 격변의 시대가 되면서, 다양한 문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영·정조 시대가 되면서, 풍요해진 경제력과 함께 조선은 제2의 문예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 민중예술의 대표 격인 ‘판소리’가 등장하였고, ‘민요’, ‘민화’와 ‘풍속화’, ‘탈놀이’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가 등장하였다.
또한 당대 서울 도성 내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지배층이었던 경화 세족 중심으로 일어났던 서화(書畫) 소장의 풍조가 서민들의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함께 서민들에게도 확산하면서 예술품 판매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강이천(1768-1801)의 '한경사(漢京詞)'� 「광통교 그림 가게」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를 통해 18세기 후반 당시, 한양의 중심부인 광통교 일대에 민중의 그림 시장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낮의 (광통교) 다리 기둥에 그림을 걸어 놓았으니
여러 폭의 긴 비단(그림)으로 장막 병풍을 만들만 하구나.
가장 많은 것은 근래 도화서의 고수들 작품이니
많이들 속화를 탐닉하니 묘하기가 살아있는 것 같다네.
광통교에서 어떤 종류의 그림이 판매되었는지는 관해서는 1844년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 풍물가(漢陽風物歌)'에 잘 나타나 있다. 광통교 아래에서 판매되었던 그림들은 궁중 회화와 민간 회화가 함께 팔렸던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언급되었던 그림들은 현재까지도 재현되어 그려지고 있는 그림들이다.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의 백자도 요지연과/
곽분양행락도며 강남 금릉 경직도며/한가한 소상팔경 산수도 기이하다./
다락 벽(壁) 계견사호(鷄犬獅虎) 장지문 어약용문/해학반도 십장생과 벽장문차 매죽난국/
횡축을 볼작시면 구운몽 성진이가/팔선녀 희롱하여 투화성주(投花成珠)하는 모양/
주나라 강태공이 궁팔십(窮八十) 노옹(老翁)으로/사립(紗笠)을 숙여 쓰고 곧은 낚시 물에 넣고/
때 오기만 기다릴제 주 문왕 착한 임금/어진 사람 얻으려고 손수 와서 보는 거동/중략/
문에 부칠 신장(神將)들과 모대(帽帶)한 문비(門裨)들을/
진채(眞彩) 먹여 그렸으니 화려하기 축양없다.
그림 시장의 형성 배경으로 당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화원들은 생계를 위해 개인적인 활동, 즉 궁중의 그림이 아닌 광통교에서 팔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흘러나간 궁중 화풍의 그림들은 민간 화가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에 의해 재생산되어 민간 속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또한 민간의 그림 수요가 급증하면서 광통교 부근의 그림 가게인 지전에서는 ‘지전 전속 화가들’을 두고 그림을 그려 팔았으며, 궁중 화풍의 그림, 민간화 된 궁중 화풍 그림, 민간에서 자생한 그림이 급속하게 확산하면서 민중을 상대로 하는 전업 화가들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전업 화가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다기보다는 그림의 수요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그림을 그려주고, 그림에 대한 보상도 수준에 따라 거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중을 상대로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화’는 이 전업 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게 되면서, 이것은 곧 정치적·사상적·문화적·경제적인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고, 또한 ‘문화의 향유층’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져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문화의 향유층이 본래 왕실과 양반들로 ‘왕실 문화’였고, ‘양반 문화’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궁중 회화’로 대변되는 ‘왕실 문화’가 ‘양반 문화’로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들만의 ‘자생 문화’가 있었지만, 선망의 대상이었던 ‘왕실 문화’, ‘양반 문화’가 일반 백성들에게 끼친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실 문화’, ‘양반 문화’와 ‘백성 문화’와의 습합(習合)이 일어나게 되고, 그 습합의 결과물이 ‘민화’로 대변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거북’ 도상도 민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민화에 묘사된 ‘거북’은 십장생도·화조도·신귀도(神龜圖)·어해도·화조도·신선도·쌍귀도(雙龜圖)·현무도(玄武圖)·문자도·책가도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민화 속에서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는, 즉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여겨져 <십장생도>로 그려졌고, <윤리문자도>의 ‘예’를 상징하는 소재로 그려져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의 이념을 잘 나타내 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처음에 궁중 회화로 그려지다가, 점차 민화 속에서 서민들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거북에 대한 상징 또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징성이 가미(加味)되거나 배가(倍加)되어 나타났다. 거북 그림은 다양한 화목(畵目)과 어울려지며, 그 화목들이 가진 상징성과 거북의 상징성이 합쳐지면서 배가되어 민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왕실 어보(御寶)의 손잡이(귀뉴, 龜紐)를 주로 거북 형태로 만들었던 점을 볼 때, 거북은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상징물이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민화와 공예품 속에 나타난 거북은 조선시대의 경제적·사상적 변화를 대변해 주는 상징이 되었다.
※ 조선 왕실 어보(御寶) : 왕을 비롯한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등 왕을 중심으로 한 직계 가족들을 위한 개인 도장이다. 이 도장은 왕비나 세자 책봉 시, 당대나 선대의 왕과 왕후에게 시호(諡號)나 존호(尊號)와 같은 덕을 기리기 위한 칭호를 올릴 때 주인공에게 그 명칭을 새겨 수여했던 것으로, 왕실의 권력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최고의 상징물이다. 외교문서나 행정 업무에 사용했던 국새와는 달리 의례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궁궐에 보관했다가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종묘에 함께 봉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