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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Aug 08. 2022

희열 : 작고 사소하여 고맙습니다

         -  모르는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보름 동안의 슬픔과 위로의 날들이 끝났다. 엄마는 엄마 시의 구절처럼 '살아서는 한분이시더니 안 계시니 삼라만상이 다 엄마다'가 딱 맞아떨어지는 듯 순간순간 문득문득 엄마는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돌아서면 보이고 걷다 보면 나타나는 엄마가 질리지도 않고 그립다.


 오늘도 가볍고 안온한 느린 달리기를 했다. 태재고개를 힘겹게 달렸다. 천천히 그리고 쉼 없이. 아직도 숨 바투 달리면 가라앉는다. 슬픔 혹은 아픔. 오늘도 달렸다. 태재고개 다 오르면 열병합발전소 높은 굴뚝들이 깜빡깜빡 점멸등으로 손짓을 한다. 오늘도 숨 밭으며 간신히 간단히 달리다 굴뚝들에게 인사한다.

스트라바는 기억이자 추억이고 생존 신고.


 몸이 먼저 끝이 다가옴을 알아채고 다리는 더욱 무겁고 숨은 휴식을 재촉한다. 영장산 넘어가는 육교를 지나면 1킬로 남짓에서 끝난다. 약간의 아쉬움으로 힘을 내는 자리다. 산소최대섭취량(VO2Max)을 늘리는 훈련이라 여기고 마지막 힘을 내서 달린다.


 영장산 가는 육교가 보이는 멀지 않은 자리에서 부부가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잘 들리지 않는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니 줄이지 못하고 아무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려는 내게 남편이 말을 건넨다. 요새 몇 번 시청한 드라마 '인사이더'에서의 악당 양 씨 형제 중 동생을 닮은 얼굴이다. 길게 내리 뻗은 얼굴에 굵고 각진 안경에 머리는 길어서 돌돌 말아 꼭대기에 똬리를 틀었다. 말을 건네는데도 멈추지 말아야지 했다. 인상이 멀고 무거운데 말을 건네는 남자의 표정은 가볍고 화창했다. 발이 먼저 멈췄다.


 "아, 저 밑에 고라니 세 마리가 있어요. 얼른 봐봐요. 저기, 저 아래 보이죠. 두 마리는 갈색에 흰 턱선을 가졌어요. 한 마리는 좀 작네. 새끼인가. 잘 생겼어요. 보여요? 보이죠? 아, 세상에, 고라니를 이렇게 가까운 골짜기에서 보다니. 우린 진짜 행운이네요, 행운. 아니, 근데, 이 더운데 뛰시는 거예요? 이 언덕을 뛰어온 거예요? 대단하시네. 어이쿠, 이제 살살 걸어가요, 에?"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속사포 감탄의 의문문들과 말들이 짧은 순간에 지나다 멈췄다. 멀리서 무신경으로 언뜻 보면 날 선 험한 얼굴이었는데 말 건네는 표정은 밝고 환하여 듣는 작은 시간 기분이 훅하고 올랐다. 고라니와의 만남에 대한 응대와 그들 세 마리의 움직임에 대해 함께 경탄을 했다. 마치 함께 지내던 친구처럼 살이 올랐네, 털이 곱네, 먹거리가 없어 예까지 온 것이네 하며 잠시 서로 대꾸했다. 손을 흔들고 조심히 가세요, 하며 난 다시 달렸다.

태재고개를 내려가면 언제나 아스라히 요한성당이 우릴 향해 웃어준다.

 조용히 앉아 돌아본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류의 뻔한 생각이 지나고 '따뜻한 사람들이 참 많다'를 건너 곰곰 생각한다. 모르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과 모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 나는 말을 건네는 것을 더 자주 해왔던가, 아닌가. 분간하지 않아도 좋을 물음들 속에 나보다 아주 조금 나이 들어 보이던 그분의 표정이 떠오른다. 밝고 환하고 구김 없이 천진한 그 표정. 놀람과 신기함을 함께 하자고 지나는 이들을 불러 세우는 그 당찬 천진함이 멋지다.


 무척 외롭고 쓸쓸한 누군가가 저 멋진 남자의 '당찬 천진함의 순간'에 초대된다면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일까? '대책 없는 주책과 오지랖, 환희와 기쁨의 공유'의 경계에서 우리는 늘 머뭇거린다. 대부분 지나치고 모른 체한다. MZ세대들은 아는 체하는 행위를 적대시한다고도 들었다. 강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선택이고 주장이다. 자기만의 틀과 울타리 안에 사는 것은 당연하다.


 잠시 잠깐의 시간 동안 기뻤다. 함께 놀라워하며 신기한 영화를 보는 친구들처럼 고라니에게 소리 질러 움직이라는 말도 하면서 기뻤다. 대체 우린 언제 보았다고, 대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거라고 이렇게 함께 기뻐하고 감탄하며 소리 질렀을까? 답은 이것뿐이었다. '사람들끼리 하는 짓'을 했다.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짓'을 했다. '사람들끼리 해도 되는 짓'을 했다. "아저씨! 말 걸어 걸음 멈추고 같이 보고 신나게 소리 내어 웃게 해 주셔서 고마와요! 고마와요!" 이런 희열, 이런 기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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