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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Sep 27. 2022

고춧잎을 뜯다

 

 

   고춧잎을 뜯다



  매달린 고추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과습인가 하여 흙을 들추고 고랑을 터주었다. 속절없이 붉은 것들, 풋들 모두 썩어갔다. 살릴 고추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고추나무를 뽑았다. 얕고 가는 뿌리에 성긴 흙들이 붙었다 바숴지고 쉬이 흩어졌다. 공중에 갈색 연기 피어 올라갔다. 가지들을 잘게 부러뜨렸다. 잎들을 훑고 고추를 떼어냈다. 두 플라스틱 바구니에 따로 담았다. 고춧잎들이 크고 넓은 채 희미하게 햇살을 퉁치며 지나갔다. 앙상한 통 줄기는 핏기 없이 바싹 말랐다. 초록 남은 샛 줄기 새끼들은 아직 꼿꼿했다. 스스로 하늘을 받치고 서서 오래 땅을 보았다. 미련은 애도를 막을 뿐, 이제 가벼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들먹이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게는 경의가 필요했다. 담벼락에 기대 기다렸다. 비틀어 말라가는데 사흘은 부족했다. 다음번엔 저절로 사라지는 복을 받을 길을 궁리했다.


                          (2022. 9. 27)


삶이어, 저절로 사라지는 것들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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