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메리카노를 먹었을 때가 떠오른다.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갔는데 친구들 중 한 명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나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몸만 어른인 아이였으므로 초콜릿 라떼를 주문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못했으므로 친구의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뺏어 먹고 이렇게 외쳤다.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이런 건 무슨 맛으로 먹는거야?'
'깔끔하잖아, 조금만 있으면 너도 아메리카노만 먹게 될걸?'
시간이 지나자 우린 커피를 시켜먹기 시작했는데 카라멜 마끼야또가 한계였다. 그보다 더 쓴 커피는 너무 써 마시질 못했다. 난 그때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실 줄 알게 되었으니까! 카라멜 마끼야또만 먹으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거기다가 술집에 주민등록증을 당당히 내밀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운전면허증도 땄으니까 정말 어른이 된 거지!
그 땐 몰랐다, 진짜 어른은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된 순간부터 온다는 것을. 친구의 말처럼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아메리카노를 생명수처럼 달고 사는 피곤함에 찌든 '진짜 어른'이 되어버리니 하루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못하면 피곤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아메리카노를 마실 줄 알게 된 이후에는 원두의 맛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카페에 가면 산미가 있는 것과 고소한 맛이 나는 것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처음엔 두 가지 맛을 구분하지 못했다. 여러 번 원두를 바꾸어서 먹어보고,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스페셜티도 마셔본 이후에야 혀가 조금씩 맛의 차이를 감별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취향을 알아가게 되었다고 할까? 나는 산미 있는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었다.
산미 있는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줄 알게 되는 어른이 되어서야 청춘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다. 청춘 드라마를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아련함, 그리움.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며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콱 막혀온다. 그 맛은 쉽게 씻겨내려가지 않고 가슴 속 돌덩이가 되어 콱 박혀버린다. 그 돌덩이를 치워내면 어린 시절의 꿈 많던 내가 보인다.
청춘이 지나가는 순간은 '카라멜 마끼야또에서 아메리카노까지'라고 답하겠다. 청춘이 지나간다는 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삶의 지혜와 혜안이 생긴만큼 해맑음과 순수함은 잃어버린다.
청춘이 지나갔음을 알게되는 순간은 '아메리카노'라고 답하겠다. 언제부턴가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고, 언제부턴가 커피 취향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다. 현실과 이상을 타협할 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커피 취향이 바뀐다.
난 어린 시절 꿈꾸었던 우정, 사랑, 꿈 모두 못 이루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다. 나한테도 빛났던 순간들이 있었고, 처음이어서 서툴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 순간들이 지나가 서글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순간이 내게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하다. 다들 눈을 감고 그 순간들을 떠올려 보시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가?
아, 내일 또 출근하면서 아메리카노를 사먹겠지만 가끔은 초콜릿 라떼와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해본다. 지금은 달아서 한 잔을 다 못 먹는 걸 알면서도 커피 한잔으로 세상을 꿈꾸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