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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는가

최근 소개팅 경험에 대한 단상 그리고 타인 의식

by 개미
"죄송한데ㅠㅠ 오늘 약속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ㅠㅠ 몸이 좀 안 좋아서 반차 쓰고 집 가는 중이라..ㅠㅠ 죄송해요"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약속 4시간 전이었다.

소개팅 약속이 취소됐다.

원래는 저번 주에 만났어야 할 약속인데 내가 한 번 미뤘다.

저 연락을 받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은 '타인'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0. 여는 글


최근에 소개팅을 했다.


프로그래밍 작업, 미디어 기자 생활, 졸업 논문 준비 등

바쁜 날의 연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됐다.


전쟁 통에도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데

바쁜 게 뭐라고 연애를 미루냐는 아는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소개팅이라면 거의 두 자릿수는 해본 터라 별로 거부감도 없었고.


여차저차해서 서로 연락을 하고, 약속 날짜를 잡았는데

상대 여성분께서 몸이 안 좋아져서 약속이 취소됐다.


서운했다. 약간 화도 났다.


갑자기 자주 아픈 경험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서

메시지를 받자마자 '사람이 아플 수도 있지..' 하고 이해했지만


분명히 서운하고 화가 났다.


그 후 내 감정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나는 왜 서운했을까? 왜 화가 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 깨달았다.


그 사람은 전혀 상관없었고,

나 자신에게 서운하고 화가 났다는 것을.







1. 소개팅


8월 4일.

그러니까.. 2주 전 오늘이다.


대학원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 왔다. 소개팅을 주선해준다는 연락이었다.


선배는 그분이 본인 학교 친구였다는 말과 함께

이름, 직업 등 아무것도 모른 채 번호만 건네주고 사라졌다.


요즘 들어 특히 바쁜 일이 많아서 흘려 들었던 탓인지

연락하는 것을 3일이나 잊어버리고 늦게 연락했다.


그리고 그 주 목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생각해보니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파마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머리도 이상했고, 평소에 끼고 있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린 지 2주가 지나서 렌즈도 없었고,

렌즈를 살 돈이 아까워서 구입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대로는 소개팅을 나가도 나 자신이 되게 별로일 것 같았다.

그래서 콘택트렌즈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송기간은 소개팅 이후가 될 것 같다는 안경점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약속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불과 며칠 만에 내가 기존에 결정했던 것들을 모두 바꾼 것이다.


이름도 모르고, 소속도 모르고, 심지어 사진도 없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비용을 지출하기로 결심하고, 바쁜 스케줄이 있는 데도 다음 주로 무리하게 약속을 미뤘다.






2. 나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의식하는가


나는 이중적인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이중적인 면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그렇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소개팅에서 상대방이 아프다고 했던 날.

나는 밤을 새우고 아침에 3시간 정도를 겨우 잤다.


원래는 더 오랜 시간을 자려고 했지만

약속을 위해서 피곤한 상태로 일어났다.


일어나서 내 바지에 어울릴만한 벨트를 구매했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멀리 위치한 미용실에 드라이를 예약했으며

괜찮은 사람이면 좀 더 같이 있기 위해서 저녁 영화 2자리를 예매했다.


마침 드라이를 예약하는 순간

연락을 통보받았고, 나는 모든 것을 다 취소했다.



3분만에 헤어샵 취소하기.




이번 계기에 처음 알게 됐는데, 영화는 상영 시작 전 15분 전까지 취소 가능하다.



메시지를 통보받은 후,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지내면서 나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것을.


예전 연애할 때의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 간 걸까?

왜 나는 그동안 미뤄놨던 렌즈며 헤어스타일이며 갑자기 하는 것이지?

나는 이것을 핑계로 다시 나를 확인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디를 가서든 "나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일상에 치이며 내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감정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3. 다시 내게로



나는 내 자신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예전에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이다.


마침 1년 전 내가 올렸다고 알림을 주는 탓에 알게 되었는데,

이 영상을 다시 보고 브런치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삶에 대한 목적의식, 내 존재에 대한 자존감,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등


그동안 내가 많이 잊고 있던 것을 되돌아보게 됐다.


운동을 하면서 건강 관리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책을 읽으며 기쁘게 공부했던 내가


기사 글을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고,

졸업 논문과 교수님께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 지의 걱정으로


그동안 점점 작아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내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픈 것은 조금 괜찮아졌는지, 병원은 갔는지 물어보는 내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답장하지 않는 그녀지만


이런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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