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가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우화소설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1970년에 발표된 소설의 원 제목은 《Jonathan Livingston Seagull》. ‘불후의 명작’이란 수식어를 늘 달고 다닌다.
주인공 갈매기다.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조나단 리빙스턴은 하늘을 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고깃배와 선창가 주변을 맴돌며 오로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날갯짓하는 동료들과 다르다. 홀로 하루 종일 수백 번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하늘을 나는 것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의 이유다. 일차원적인 생존수단이 아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 리빙스턴의 이 같은 행동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조나단 리빙스턴의 행동이 갈매기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결국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 사회 전체 회의에서 심판을 받는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죄명은 종족의 존엄성 파괴와 정통성 유린이다. 분별없고 무모한 행동이 갈매기 종족의 생존과 번영에 암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유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 사회에 자신의 행위를 삶의 의미를 찾고 발전을 추구하는 책임감 있고 헌신적인 태도라고 강조한다.
결국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 사회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조나단 리빙스턴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열정을 불태운다. 예전처럼 먼바다로 나가 홀로 외로운 비행 연습을 계속한다. 세월이 흘러 조나단 리빙스턴은 기존 차원을 넘어선 혁신적인 비행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갈매기 사회에서의 추방이 오히려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자신의 혁신적인 비행기술과 노하우를 다른 갈매기들에게 들려준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갈매기 사회에서 ‘위대한 갈매기의 아들’로 불리게 된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눈이 가르쳐주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믿지 말아라. 마음의 눈이 가르쳐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비로소 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창공으로 사라진다.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존재의 이유를 찾으라는 것, 내 안의 가능성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긴 여정은 홀로서기의 과정이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 가끔씩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을 때면 질문의 강도는 더 세진다. 이 상태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자책이다.
그런 질문과 자책의 배경에는 대개 ‘자극’이 있다. 어느 시인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좇아 작은 시집 전문 서점을 냈다는 소식은 신선하면서도 따끔한 ‘바늘’의 자극이다. 별 볼일 없을 것처럼 보이던 지인이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가슴 쿵하는 ‘못’의 자극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결과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바닥을 뒤흔드는 ‘해머’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부러움도 있지만 9할은 나의 내면을 향한다. ‘자극’은 어느새 분발을 촉구하는 거센 채찍질이 된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가 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다. 학창 시절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시이기도 하다. 두 갈래 길이 있고, 고민 끝에 선택한 한 길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는 내용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도 담고 있다. 어차피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운명 아닌가.
삶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원본 인생과 복사본 인생. 원본은 ‘오리지널’(original)이고, 사본은 ‘카피’(copy)다. 갈매기 조나단은 말할 것도 없고, 앞서 거론한 시인이나 지인이나 친구는 적어도 원본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원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건,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복사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본 인생과 복사본 인생을 가르는 기준은 간단하다. 원본 인생은 삶의 초점을 ‘나’에게 맞춘다. ‘곁눈질’ 하지 않는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시선’을 추구한다. 남들이 다 좇아가는 유행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취향을 고수하는 거다.
내 안에 잠들어있는 잠재력을 깨워 내게 주어진 삶을 오리지널로 치열하게 사는 것. 이게 바로 소명의 삶이고 주인의 삶이다. 주인의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 다운 삶을 향한 ‘첫걸음’을 떼야하니까.
복사본 인생은 원본 인생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진다. 삶의 초점이 ‘남’에게 맞춰져 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고 남들이 가니까 따라간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노예의 삶이다. 복사본 인생에 필요한 건 ‘눈치’다. ‘남’이 나의 마음을, 내 의식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여 원본, 복사본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간다면 ‘재창조’와 ‘답습’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인간에게 ‘순수한 창조’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되 재창조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오리지널의 삶이요, 그저 답습에 머무는 것이 카피의 삶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잠재력의 4분의 3을 상실한다.”
쇼펜하우어가 일찍이 복사본 인생에 남긴 경고다.
위대한 인권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도 홀로서기와 관련해 명언을 남겼다.
‘군중과 함께 하는 것은 쉽지만 홀로서기는 용기가 필요하다.’(It is easy to stand with the crowd. It takes a courage to stand alone.)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를 깨우는 깊은 생각, 홀로서기를 위한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