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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y 20. 2020

그 사람, 뫼르소...

이방인 (by Albert Camus)

  

   나의 뫼르소를 만났다.

  ‘나의’라는 수식어는 상당히 작위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뫼르소의 절제된 언어로는 독자들 사이에서 ‘보편적’ 뫼르소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눈 앞에 벌어지는 일을 1인칭 화자로서 직시한다. 백 프로 동화되기 쉽지 않은 나는, 약간은 떨어진 거리에서, 그 만큼의 굴절된 각도로 그의 말을, 생각을 느낀다.

 내가 만난 그는 이런 사람이다.

  무대 위 홀로 앉아 자신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밝히는 이. 그의 세계에서 입체적인 것은 단 그 자신 하나. 나머지 사람들과 사건들은 그의 눈을 매개로 촬영되는 평면적인 흑백영상일 뿐이다. 왜 그렇게 느껴 질까? 그가 자신을 둘러싼 배경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뫼르소의 일상에 배경일 뿐인 그들, 그 일들…

  어머니의 죽음… 일상에 균열이 간 사건이다. 직장에서 싫은 내색의 상사에게 휴가를 받아야 하는 일, 평소에 가지 않던 양로원에 두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졸며 가야 하는 일, 피곤을 무릅쓰고 밤샘을 해야 하는 일, 그럼에도 당연히 치뤄야 하는 일, 상실감의 의미가 아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현상일 뿐인 것이다. 현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good/bad를 토대로 한 필터가 없다.

  그런 그에게 장례식 다음 날 마리에게 첫 욕정을 느낀 것은 어머니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전에 호감을 가졌던 그녀와 우연히 재회한 것이 공교롭게도 그 날인 것이고, 주어진 상황에 마음이 좇은 것이다. ‘공교롭다’는 표현도 뫼르소에겐 낯설다. 각도가 비켜난 시야에서 본 입장에서는 ‘공교롭지만’, 그의 직시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상에 대해 행동을 추동시키는 판단은 말 그대로 즉흥적이다. 그의 감정에는 문명이 덧입혀 놓은 도덕적 잣대가 없다. 레몽의 정부가 폭력을 당할 당시, 경찰을 부르라는 마리의 요청에, 판단의 방점은 타자가 아닌 자신이다. 경찰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거절이다. 평판이 좋지 않은 레몽과의 교류도 ‘말 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레몽과 친구가 된 것도 그와 친구가 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연인 마리… 결혼하자는 그녀의 말에, 해도 상관이 없다고 대답하는 그, 도대체가 그의 행동에는 인과가 없다. 그가 서 있는 곳의 배경은 가치매김을 숙명으로 하는 문명이지만 그는 그 고질적인 요소에 대해 자유롭다.

  그런 그 다운 자유로움은 태양 때문에 일어난 그 사건을 계기로 난도질 되기 시작한다.

  그 사건이 마치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 입장에선 타자인 그를, 그의 실존을 심판할 권리를 준 듯, 그들의 논리로 그를 왜곡 시킨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무덤덤 했던 태도, 어머니 나이를 몰랐던 점, 장례식 다음날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밤을 함께 보낸 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남자 레몽과 모의해서 그의 정부를 폭력 속으로 끌어들인 일, 해변에서 살인을 의도하고 행한 일 등을 근거로, ‘권리를 양도받은’ 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인간적인 게 조금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을 지키는 도덕적 원리 가운데 어느 것 하나(139)’도 없는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배재된 재판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신에 대한 혹독한 평가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무색의 물이 된 것 같은 인상(143)”을 받는다. 즉 사람들이 해석하는 그는 이미 그 자신이 아닌 것이다.

  태양 때문에 일어난 그 사건을 계기로 뫼르소는 신과 관습과 도덕의 가치를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리듬에 자신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그 또한 그에게는 눈 앞에 펼쳐진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 세상이 매긴 가치에 타협 할 법도 한데, 그는 이를 거절한다. 죽음이 눈 앞에 있어도 그건 자신이 아닌 것이다. 뫼르소의 세계에서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돈다. 현상으로 보이는 타인의 관습적, 도덕적 가치는 흑백영화에 실린 구경거리일 뿐이다.

  죽음… 작품 속에는 세 번의 죽음이 언급된다. 어머니의 죽음, 살인, 사형의 형태다. 이들 중, 앞 두 죽음에 대해 그는 무덤덤하다. 이 또한 흑백영화의 편린이다. 뫼르소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세 번째 죽음, 자신의 죽음. 자신의 일이 되고서야 죽음이 입체적 형상을 띤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신과 같은 통속적 내세관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지극히 사실적인 부분이 그의 의식을 맴돈다. 단두대 처형의 두려움으로 시작된 죽음에 대한 상념은, 그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언젠가는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진리로 확장된다. 죽음의 종착역에선 인간이 문명 속에서 부여한 가치 따윈 아무런 의미 없이 바스러진다. 살인범으로 고발된 후,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인간사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필멸자의 관습, 도덕 등은 죽음 앞에선 우스운 해프닝일 뿐이다. 뫼르소가 항소를 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은 아마 필멸자의 가치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사람은 목적을 위해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며, 주체성을 가진 실존이라는 의미다. 사람을 목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난색을 보이며 거부 할 말이다. 하지만 문명이 만들어 낸 거대한 틀은 실존을 거부하고 본질을 앞세운다. 전체의 '선'이라는 가치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명의 가장 큰 부조리가 있으며, 뫼르소에게 부여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가 그러하다. 뫼르소의 주체성은 무시하고, 사회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목적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를 강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 도구가 자신에게도 옥죄는 사슬이 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딜레마다.

 카뮈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그의 작풍이 상당히 흥미롭다. 사실 글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먼저 매료되었던 나였다. 1인칭 화자의 무감한 뫼르소의 톤은 소설의 주를 이루는 간접화법을 통해 절묘하게 발현된다. 다른 글이었다면 직접화법으로 주변인물들의 대사가 있어야 자연스럽다 할 공간에 고집스럽게 간접화법을 우겨 넣는다. 마치 생생한 목소리의 생명력을 없애버리려는 것처럼… 독자가 듣는 등장인물의 말은 뫼르소의 생각을 거쳐나온 말이다. 무채색으로 특징지어진 그 영역을 통과하는 것이니 당연히 색깔이 있을 리 없다. 간혹 나오는 직접화법 조차도 뫼르소의 목소리에 묻혀 있다. 직접화법의 활력을 반감시키는 효과다.

 뫼르소에 몰입되어 최헵시바 역본, 이정서 역본을 영역본과 대비하여 읽었다. 작풍이 매력적인 까닭이다. 개인적으로는 최헵시바 역본이 좀 더 내가 이해한 뫼르소와 가깝다. 뒤적일 때마다 다른 사람인 듯 느껴지는 뫼르소, 작품의 심층구조가 얼마나 탄탄한 지 그 끝을 알 수 없다. 언어의 장벽이 안타까운 작품이다. 원작이 궁금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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