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달콤 씁쓸한 나헤라의 밤

by 비아루나 Via Luna

아침에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하는데 왼쪽 발목에 통증이 심했다. 어제 약국에서 산 보호대를 하고 약도 발랐지만 왠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다니엘, 라울, 하비에르와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나는 자꾸 뒤처졌다. 앞서 가던 다니엘이 뒤돌아 서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컴 온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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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조금 걷다 보니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이스를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천천히 혼자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앞질러 가고 나는 쉬어가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한참 후에 출발한 시몬이 내 옆에서 걷고 있다. 날은 이미 밝았고 길은 다행히 완만했다.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왼쪽 발목의 통증은 걷기 힘들 만큼 심해졌고 나를 배려해 천천히 걷는 시몬과 페이스를 맞추기도 버거웠다. 시몬에게 먼저 가라 하고 나는 배낭을 풀고 벤치에 앉았다.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괜찮냐고 묻는다. 오늘 목적지까지 이미 반 정도 걸은 터라,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무조건 앞으로 가야 한다. 왼쪽 발을 최대한 쓰지 않으면서 걸으려고 했다. 좁은 길이 끝날 무렵 공원이 나오고 왼쪽에는 멀리 호수가 보였다.


더 걸어갈지 병원으로 갈지 고민이 되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조금 더 걸어서 병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제 내 뒤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마을의 오르막길을 커다란 배낭을 메고 왼쪽 발은 땅에 대듯 말 듯 오른발로 버티며 걷는다. 양쪽 스틱을 목발처럼 의지해서 걸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느리게 걷는데도 한참 후에 돌아보면 저 오르막과 내리막을 다 지나와서 나는 느리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발목은 아프지만 마음은 평화롭다. 오늘은 정말 천천히 가기로 한다. 길을 걷다 멋있는 풍경이 보이면 잠시 멈추어 섰다. 밀 수확이 끝난 후 밑동을 베어 차곡차곡 쌓아 둔 모습을 보니 마치 정갈한 집 안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멀리 두 명의 순례객이 높게 쌓인 밑동 그늘에서 쉬고 있다. 앞에 멀리 보이는 마을에 도착하려면 포도밭을 지나야 한다.


아무도 없는 길을 한참 걷는데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안녕, 인사 소리에 돌아보니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 이름은 비비안, 아빠는 독일인, 엄마는 영국인인데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었다. 오래전에 스코틀랜드 여행을 한 적이 있어서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비비안은 2주 휴가 동안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전공했는데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서 낮에는 가게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 작업을 한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왠지 그녀의 용기가 부러웠다. 비비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바레테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이 마을은 고지대에 있어서인지 아무리 찾아도 병원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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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앉아 있는데 시몬이 건너편 테이블에서 쉬고 있었다. 시몬은 다음 마을인 벤토사까지 갈 예정이라는데 벤토사는 지금보다 100미터 정도 더 고지대에 있어서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다. 다리 통증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데 지금 이 상태로 더 걸을 수 있을까? 나헤라까지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는 것이 나을까?


이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지 않고 걷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800킬로미터를 온전히 배낭을 메고 걷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면 버스를 타고 쉬어 가는 것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내가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이 오니 결정이 쉽지 않았다. 이 발목 상태로 계속 걸으면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을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발목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중도에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참을 고민 끝에 나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비비안과 시몬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배낭을 메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팜플로나에서 헤어진 스베나 일행이었다. 그들은 오늘 부르고스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다. 버스 안에는 나처럼 다리가 아파서 버스를 탄 순례객들이 몇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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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처럼 펼쳐진 길을 한참 달려 나헤라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는 중국 식당이 보였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카미노 표시를 따라 걸으니 도시 센터가 나왔다. 도심 한가운데로 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잔디밭에 반가운 얼굴들이 손을 흔들었다. 다니엘, 라울, 하비에르였다. 그 옆 벤치에는 킴과 파블로가 보였다. 킴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선뜻 약을 꺼내 나누어 주고는 파블로와 함께 다음 도시까지 걸으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나는 약을 먹고 잠시 쉬다 알베르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공립 알베르게 앞에는 벌써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가이드북에서 본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다행히 숙소는 지난 며칠간 묵었던 곳보다 훨씬 깨끗했다.


짐을 정리하고 약속한 장소에서 다니엘과 라울을 만났다. 의사인 라울이 내 발목을 청진하더니 뼈의 문제는 아니고 근육 손상인 것 같다며 약 복용법을 알려줬다. 오후에 좀 쉰 덕분에 그래도 걸어 다닐만한 것 같아 병원은 가지 않기로 했다. 라울은 고등학교 때부터 개발도상국 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 의대에 진학했고, 예방학을 전공하며 간호사 자격증까지 땄다. 겉으로 보면 세상 일에 무사태평한 스타일에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이야기할수록 그의 다른 면모가 보였다.


라울은 매사에 심각하지 않고 농담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농담 속에서 그의 내적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는 예전의 자신은 지루한 순례길을 걸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프리카에서 2년 동안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이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함께 걸을 때면 반 농담처럼 나에게 말했다. “ 너는 중요한 사람이야, 머리가 비상해.” 그의 말을 웃고 넘겼지만 나는 대학교 입학부터 항상 남보다 조금 늦다는 느낌을 갖고 살았다. 항상 나의 부족한 부분을 생각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많았던 나는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떤 사랑이든 자기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삶에서 비싼 수업료를 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불완전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상대방을 자신이 투사한 어떤 상에 고착시키기보다 부족한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라울은 잠시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는 다니엘, 하비에르와 함께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다. 건축가인 하비에르는 다양한 건축 양식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절벽에 있는 동굴 집 쪽으로 걸었다. 다니엘은 허름한 도시 외곽을 보며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모든 것들이 다 화려하고 깔끔할 필요는 없다고 남루한 것들도 다 나름대로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다니엘은 아마 같은 스페인 사람으로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니엘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 역시 대학시절에 라즈니스와 크리슈나무르티 책을 많이 읽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던 내 또래의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주제에 대해 고민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러 낮에 보았던 강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낮의 맹렬했던 열기가 잦아들고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있다. 다니엘이 나에게 오늘 버스 탄 순례자라며 놀리자, 뾰로통해진 나를 보고 라울이 괜찮다고 오늘 14킬로 걸었으니 된 거라고 위로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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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에서 처음으로 좋은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음식을 맛본다. 샐러드, 칼라마리, 뽈뽀, 토르티야를 주문했다. 뽈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즐겨 먹는 문어 요리인데 한국 음식과도 비슷해서 입맛에 잘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카드놀이를 했다. 사소한 일에 깔깔 웃고, 그 순간 자체로 충만한 저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열 시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옷을 얇게 입은 탓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다니엘이 내 등을 감싸 주었다. 다니엘이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곧 알베르게 문이 닫힐 시간이어서 모두들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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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는 알베르게를 향해 걸었는데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골목이었다. 인적이 뜸한 시간이라 낯선 골목에 혼자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되었다. 알베르게 앞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십 분쯤 걸었을까, 성당이 앞에 보인다. 다행히 성당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몇 번 노크하자 독일 할머니 순례객이 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순례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내 침대를 찾았다.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냥 우리는 좋은 친구야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지만, 다니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자꾸 아른거렸다.


나헤라의 달콤 씁쓸한 밤이 그렇게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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