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쯤 기차는 중간 역에서 멈췄다. 아직 도착 전이었지만 내릴 역을 놓칠까 봐 조심스레 일어났다. 창 밖으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바온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기차역 카페에서 카페오레와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기차가 연착된 탓에 생장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다음 버스는 한참 지나야 도착 예정이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프랑스의 시골역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차의 연착처럼, 카미노를 걷는 여정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길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것뿐이다.
따뜻한 카페오레 한 모금에 기차의 노곤함이 풀린다. 생장드포르행 빨간 버스가 도착했다. 배낭을 메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허름하고 작은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하얀 개를 데리고 차에 오른다. 키가 크고 곱슬거리는 금발을 느슨하게 묶은 그녀는 언뜻 보기에도 순례자 같았다. 개와 함께 걷는 순례길은 어떨까?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데다가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에 졸음이 계속 쏟아진다. 버스가 1시간 반 정도 달려 생장드포르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줄지어 내렸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지도를 얻고 순례자 안내소 위치를 확인했다.
생장드포르는 좁은 골목길들이 많다. 경사 진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선 카페와 수백 년 된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유럽의 시골에는 집들마다 창가에 화분들이 걸려 있다. 색색의 벽 위에 나란히 걸린 꽃들을 보니 이곳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졌다. 순례자 안내소에는 책자에서 읽었던 것처럼 자원봉사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영어를 하시는 분이 거의 없어서 고등학교 때 배운 짧은 불어로 겨우 내일 묶을 피레네 산맥의 오리손 숙소를 예약했다. 10킬로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깨가 불편했다.
순례자 안내소를 나와 한참을 걷다 살롱 드 떼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프랑스식 아침 식사인 쁘띠 데쥬네를 주문 후 카페를 둘러보는데 2층에서 순례객처럼 보이는 커플이 배낭을 메고 내려왔다. 카페 2층은 숙소라고 했고 가격도 호텔보다 저렴해서 이곳에서 첫날밤을 묶기로 했다.
생장드포르 도시 구경을 하러 무작정 걷다 보니 조그만 성벽이 보인다. 성벽에 올라서 본 생장드포르는 주황색 지붕들이 마치 중세 도시인 톨레도나 프라하를 연상시켰다. 그 도시들보다 훨씬 소박하고 피레네 산맥의 한 귀퉁이에 있지만 평화로운 느낌이 좋았다. 저 집들도 매일 웃음만 넘치는 것은 아니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각자의 무게를 이고 가는 것처럼 저 집들도 그렇겠지.
성벽에서 내려와 길을 걷다가 성당을 발견했다. 안에는 유럽의 여느 성당처럼 어둠 속에 수십 개의 양초들이 타고 있었다. 나는 양초 하나를 들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제가 가는 길에 대한 믿음과 도전할 용기를 얻고 싶습니다.
숙소로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내일 먹을 물과 음식을 샀다. 배낭 메고 고작 조금 걸었다고 벌써 발목과 다리가 아파온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며 순례길 안내서를 읽다 나도 모르게 20분간 잠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아기자기한 이 숙소는 습기 때문에 이불이 눅눅했다. 하는 수 없이 침낭을 꺼냈다. 짜증이 나는 마음을 누르며 생각했다. 이 길이든 인생이든 숙소든 그냥 믿고 맡겨보기로 하자. 다만 그 안에서 알아차리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자. 다양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 선택이 내가 원하는 행복이나 삶으로 나를 이끄는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