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의 첫 번째 준비물
내가 소형 SUV를 살 당시에만 하더라도 투박해 보이기만 하던 SUV는 전혀 내 취향도 고려했던 차종도 아니었다. 나는 사실 날렵하게 생긴 승용차를 사고 싶어 했었다. SUV를 사게 된 이유는 그저 단 한 가지. 교통사고가 난 후 나의 첫차인 경차를 폐차하면서 사고의 두려움으로 차 구매 시 제일 먼저 고려하게 된 안정성 때문이다. SUV는 차체가 높아서 승용차와 부딪혀도 깔리기보다는 승용차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좀 더 안전하다고 한다.
그리고 출시된 많은 종류의 SUV 중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베뉴.
아반떼 신모델과 베뉴를 나란히 시승을 해 본 후, 이미 한국시장에서 충분히 검증된 아반떼 신형에 비해 당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장에서 아직 간 보기 중이던 신차에, 그것도 정직하게도 요령껏 가성비 좋을 만한 적당한 옵션만 골라 나에게 추천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풀옵션으로 선택하여, 시승 바로 다음 날 빠른 구매 결정을 한 내가 마냥 신기해 보였는지, 판매 영업직원이 베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SUV이기도 하고, 앉았을 때 특히 좌석이 편했다고 질문을 받자마자 즉시 머리에 떠오른 이유 두 가지를 알려줬다.
당시 내가 베뉴를 선택한 이유를 전체적으로 종합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안정성 - SUV라 안전해 보였고, 풀옵션으로 하면 각종 운전 보조 기능 및 안전장치가 많아 안심되었다.
2. 좌석의 편안함 - 당시 사고로 목, 허리가 앉으면 많이 불편했는데, 좌석이 가장 편안했다.
3. 디자인 - SUV 중에서도 나름 귀여웠다. 특히 뒤태가. SUV 치고는 몸집이 크지 않아서 남자들에게는 SUV로서의 메리트가 없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취향도 그렇고 내 운전실력으로는 큰 차체는 오히려 부담스러워 여자인 나에게는 소형 SUV가 딱 적합했다.
4. 현대의 브랜드 - 국내차 중에서는 현대차가 그래도 연비가 효율적인 편에 속했고, 서비스도 괜찮아 보였으며, 인기 있는 브랜드인 만큼 중고차 시장에서 재판매 가치가 가장 높다 판단했다.
5. 가격 만족도 - 당시 예정에 없던 지출이라 신차 구입 자체가 부담스러웠는데, 가성비 좋은 선택으로 보였다.
당시 전기차가 드림카였던 나는 이렇게 내 취향과 거리가 먼 SUV를 구매하면서 처음에는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으나, 차를 탈 수록 가성비 좋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특히, 뒤 좌석을 제치면 꽤 큰 짐도 싣는 것이 가능하고 트렁크 밑에도 수납공간이 있고, 고속도로 운전을 많이 하던 내게 도로 이탈 방지장치와 크루즈 기능은 무척 편했고, 앞차의 갑작스러운 출발 및 정차, 혹은 끼어들기 시 알람 등의 기능은 아찔할 뻔한 순간들을 막아주었다. 공기청정, 적외선 무릎 워머, 음성인식이나 스마트폰 원격제어 기능도 유용하며, 아직 써보진 않았지만 험로 주행모드도 선택 가능하다고 한다.
인도시장에 먼저 출시가 되다 보니 가격대가 비싸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높은 사양에 들어간 기능도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교통사고로 떠밀리듯이 한 선택인 듯 한 첫 느낌과 다르게 여러모로 나는 현재까지도 꽤 만족하고 있다. 전조등과 후미등 모양이 꽤 귀여워서 나는 내 차를 볼 때마다 꼭 멍멍이를 보는 듯해 주차장에 덩치 큰 애완견 하나를 매어다 둔 느낌이다. (사이드 미러를 접어놓은 모습이 꼭 귀를 접은 강아지 같다.) 지금은 도로에 베뉴가 제법 보이지만 내가 차량을 살 때만 하더라도 한국 출시 초창기라 거의 몰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도로에서 흔치 않은 같은 뒤태를 마주치기만 해도 "친구닷!' 하며 반가움을 금치 못해 정작 들리지도 않을 혼잣 인사말 하며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이때의 선택이 SUV가 아니었다면 나는 현재 차박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며, 왠지 모를 안도감과 감사함마저 느낀다. 왜냐하면 SUV가 아니었다면 차박 키트를 지원 신청해 볼 생각 조차 못해봤을 것이고, 여러 지원자들 중 내가 유일한 차박 키트 체험자로 선정된 것도 업체에서 베뉴가 특색 있는 차종이라 관심을 가지고 설치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려준 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차박의 첫 번째 준비물은 머니머니 해도 SUV다.
내친김에 내가 차박의 로망을 실현시키게 된 전제가 어떤 것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구입한 SUV,
목, 허리 통증으로 장시간 운전을 힘들어해 중간중간 누워주는 것이 좋음.
휴직으로 사람들이 분주한 평일에도 비교적 한가한 시간적 여유로움,
심심한 나머지 시민 참가단 참가로 차박 키트를 받을 수 있게 됨.
이쯤 되니 순간 차박의 전제 조건은 어쩌면 교통사고였던 건가?
하는 무섭고도 소름 돋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며 본능적으로 이내 손사레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구입한 SUV,
교통사고로 인한 목, 허리 통증으로 장시간 운전을 힘들어해 중간중간 누워주는 것이 좋음.
교통사고로 인한 휴직으로 사람들이 분주한 평일에도 비교적 한가한 시간적 여유로움,
교통사고 휴직으로 쉬는 중 심심한 나머지 시민 참가단 참가로 차박 기트를 받을 수 있게 됨.
차로 인한 상처를 차로 달래라는 하늘의 깊은 뜻인 건지,
삶에 닥친 불행이 꼭 불행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거란 긍정적인 생각도 잠시 머리를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