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처럼 흠뻑 젖어든 나의 느린 슬로우 라이프 속 세 살배기 인생에 꿈틀거리며 피어난 새싹은 브런치였다.
시작은 이랬다. 우연히 알게 된, 글을 좋아하는 마니아들만의 플랫폼 '브런치'와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작가'란 타이틀. 나의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책 출판"이 떠오르자, 글쓰기는 자신 없지만 내 꿈에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휴직의 시작 무렵 2020년 끝자락 12월, 한 해가 저물기 전 무언가 이루겠다는 막연한 의무감에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시작한 무모한 첫 번째 도전과 탈락의 고배, 그리고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불타오르는 의지와 떨어진 오기로 별반 고심의 퇴고를 거치지 않은 일주일만의 재도전에 연이은 낙방. 브런치에서 떨어진 마음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 다른 바쁜 일상들에 브런치는 어느덧 나의 글들과 함께 빛바랜 서랍 속에 고이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떠난 여름 남해 여행의 돌아오는 차편에서 일행 중 한 동생이 나에게 일기를 써보라 권한다. 좋았던 기억을 잊지 않으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좋으니 나도 한번 써보라 권유한 것이다. 옆자리에서 운전하던 동갑내기 친구도 수줍게 커밍아웃한다. 매일 아침 일기를 쓰고 있다고.
소름 돋게도 이 말을 꺼낸 이들의 성별은 모두 남자다. 나는 뒤바뀐듯한 감수성과 성 정체성에 잠시 혼란을 일으켜 뒤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다. 나의 감수성과 섬세함이 대화자들의 평균에서 한참 모자람에 다시금 반성하면서 한번 '일기'에 대해 되뇌어 보았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두는 글.
초등학교 시절 숙제처럼 의무감이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져 가는 기억력 속에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들의 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쓰는 글.
브런치가 불현듯 나의 머리를 스쳤고, 나는 그렇게 먼지가 쌓이게 닫아 놓았던 브런치의 서랍을 다시금 빼꼼히 열어보게 되었다. 어느덧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나의 글들은, 당시에는 최선이라 자부하며 써 내려갔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유치하기 짝에 없었다. 기존 글들을 과감하게 수정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것들'이란 글은 아예 새롭게 써서 제출했다. 한껏 힘을 준 글보다 한층 힘을 뺀 글이 오히려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통과되었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내 생각을 붙잡아 두기 위해 탄생한 매거진이 바로 [머리속 스냅샷]이고, 일기를 쓰고자 했던 원래 취지를 살리고자 [여행일기] 매거진을 만들었다. [세 살 배기]는 예전부터 쓰고 싶었던 내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을 다룬 자서전 에세이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우연히 찾아온 나의 휴식기에 아직도 어색한 타이틀인 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