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사담당자의 단상
백비탕(白沸湯)이라 했던가? 뜨거운 물 한 잔을 정수기에서 내려받았다. 물을 반 컵 마시고 책상에 앉았는데 출출함이 슬슬 몰려온다. 아직 아침 먹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간단하게 스틱형 치즈 하나 먹을까 하고 냉장고 홈바 문을 열었다. 치즈를 꺼내려하는데 작년 말에 선물 받은 무화과즙 팩 하나가 눈에 띄었다. 키토식(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 한다고 한동안 탄수화물을 꺼렸던 터라 아침에 공복에 먹으면 좋다고 했던 무화과즙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하! 배고픈데 잘 됐다. 이젠 키토식 안정화(?)도 됐으니 이거나 마셔볼까?' 살포시 무화과즙 팩을 꺼내서 가위로 양 모서리를 잘라낸다. 초등학교 때 배운 과학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졸졸졸 무화과즙이 자그마한 머그컵에 담긴다. 한 모금 입에 넣는데 살살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덧 시선을 창 밖을 향한다.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하얀색 마스크를 끼고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꽃샘추위 탓에 날씨가 쌀쌀해져서인지 오늘따라 잰걸음들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밥벌이의 서글픔이 슬며시 올라온다. 그 역시 월급쟁이 노동자로 살고 있지만 재택근무를 허가(!)해준 좋은 회사에 다니는 덕에 잠시 관찰자로 살고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 근무해줘서 고맙다는 표현으로 얼마 전 받은 '15년 장기근속 금 코인'이 책장 한편에서 반짝인다. 한 세대가 30년이라고 하면 '반 세대'의 기간 동안 무엇을 했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했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때론 조직에서 동료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함께 받을 정도로 인정받기도 했고, 때론 낙심과 낙담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시간을 회고만으로도 그는 '성장 추구', '의미 찾기', '관계 맺기'라는 키워드로 살아온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회사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었냐는 주변에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사회 초년 시절에는 다른 길을 두리번두리번 찾기도 했지만 이 곳에 많은 성장의 기회가 있었다고. 돌아보면 거의 4년마다 본부를 옮기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분들과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근무지도 바뀌고 같은 HR 분야 안에서도 새로운 업무들을 하게 되고. 4년마다 미터기를 새로 끊는 기분, 이직한 느낌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이 '반 세대'가 지나왔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럼에도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직무를 어떻게 잘 수행할지에 대한 생각', '새로운 일들을 하면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워왔다는 점이다. 결국 '나' 자신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걸 새삼 발견했다. 노동시장에서 '아싸'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노동시장의 구조와 시스템 같은 '주어진 값'으로 여겼던 것들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부족했다고 그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자문했다. 한 회사에서 인사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자신이 이미 세팅된 사회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현실적 한계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그는 자기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한 문장을 적었다. '밥벌이와 의미 찾기의 어느 지점에서 난 늘 서성인다.'
책과 SNS 글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온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행동이 없이는 존재를 말할 수 없어.'
사회제도를 바꾸기도, 노동시장의 구조를 개선하기도 어렵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줍지 않은 조언이나 격려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의 이야기를 써야겠다. 그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면 좋겠다. 조금 욕심을 더 내본다면 나의 이야기로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를 받으면 좋겠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생각에 '저장' 버튼을 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