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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Apr 06. 2021

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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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기에 제 인생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된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는 체 해 죄송합니다만 으레 그렇듯, 이야기란 것들은 모두 첫 문장, 그리고 첫 단어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런 건 사실 하등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과연 놀라시는군요. 헌데 사연 없는 요람은 존재해도 사연 없는 무덤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다만 저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문장을 찾고자 헤맬 뿐이었습니다. 거창한 유언 따위를 남기려는 건 아닙니다. 보잘것없으면서도 지난했던 것이 바로 제 인생입니다. 지리멸렬했던 일생을 일격에 압축시킬 만한 단 한 문장. 그런 문장 하나를 가슴에 품고 영영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문장이 아니라 알맞은 단어 하나로 남아도 좋겠습니다만, 배움이 짧은 탓에 그런 고상한 단어를 찾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 역시 그렇다고요? 제 말에 공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자, 서있지만 말고 이쪽으로 좀 걸읍시다. 바람이 꽤 선선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위해 짧은 기도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역시 친절하십니다.

 아멘. 딱 알맞은 기도였습니다.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 역시 방금 그 기도만큼이나 제 인생의 맺음말로 써먹기 알맞은 문장을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기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치장할 만한, 꽤나 그럴듯한 맺음말 하나 씩을 가지길 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좀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만 그 내밀한 욕망을 쉬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남들에게 있어 그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신다고요? 그것은 섣부른 우려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정말 그렇습니다. 위인이나 천재라 불렸던 이들의 말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단물이 새어 나오지만, 저희 같은 치들이 뱉는 말들이란 마치 오래된 포도주처럼 시큼텁텁하기만 해 영 도저히 삼키기가 어렵습니다. 발효는커녕 부패해버린 그 독주를 속 안에 품고서 제 스스로 취해버리기 마련이란 말입니다.

 그나저나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잠시만요,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구태여 저를 만나기 위한 까닭이겠죠. 하여간 재밌으십니다. 당신은 사람입니까? 대답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너그러우신 분이니 저를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지요. 비록 정신이 온전하다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저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탓에 용케도 이제껏 삶을 연명해 온 것이라 여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종교라던가 예술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운명이라던가 하여간 그런 빛바랜 것들을 여태껏 믿고 핥아먹어온 탓에 이렇게 굶어 죽지 않을 수 있게 됐단 말입니다. 심지어는 사실, 이 세계가 점점 무능해져 가는 이유엔 다분히 우리들의 상상력 부재에 있다고 기꺼이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의 이러한 맹목 덕분에, 여기서 한 발짝 더 내디뎌 남들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는다고 한들 그것은 제게 있어 야유라기보다 환호에 가깝습니다. 어떠한 타격도 되지 못해 다만 우스울 따름이지요. 참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연어입니다.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어쩐지 저에 대한 모든 걸 이미 알고 계신 것만 같습니다. 덕분에 마음이 편해집니다만, 그것이 당신만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능력인 겁니까? 꽤나 부럽습니다.

 아마 당신은 저 같은 불순분자들을 이미 많이 만나보셨을 테지요. 불순분자란 말에 웃으시는군요. 괜찮습니다. 불순분자란 말이 거슬리신다면 다른 표현도 좋겠습니다. 부랑자라던지, 불량배라던지. 아무렴 상관없으시다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자조적인 표현을 빌려 당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종종 벌이는, 꽤나 유치한 악취미입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부러 제 자신을 놀림거리로 삼고선, 그 사람들 면면으로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을 관찰하는 게 썩 흥미로운 놀음거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놀이를 즐겨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었지요. 개중에는 얼마 전 집 근처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사내가 있었는데, 참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 사내는 제가 읽고 있던 책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습니다.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좋았습니다. 눈보다 코로 먼저 그를 알아봤지요. 그는 제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읽고 계십니까?"라며  걸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읽고 있습니다" 저는 대답했지요. 그는 잠시 뚱하더니 다시 말하더군요. "성경입니까?", " 성경입니다" 그는 왜인지 반갑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웃으시는  보니 당신도  책을 읽으셨나 봅니다. 소감이 궁금하지만, 그보다도,  이야기를 마저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내는 자신을 예술가라 소개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번도 빠짐없이,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물론, 일반화할  없겠지만"이라며 운을 뗐습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워 보였죠.  표현에 동요했냐고요? 그렇다기보단 일말의 증오를 느꼈을 뿐입니다. 왜냐면 그러한 말들은 실로, 편협하고 고집스런 속내를 연약한 단어와 문장을 앞세워 애써 방어하려는 비열한 주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장자들의 요식행위, 언어와 사유가 벌이는 한바탕 숨바꼭질일 뿐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일반화할  없기 마련입니다. ,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는 무용수였습니다. 국립무용단 소속이라고 했죠. 그곳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고단해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따분하다더군요. "물론, 일반화할  없겠지만 저희 같은 예술가들에게 매너리즘은 일종의 만성적인 질병입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예술을 천박히 여기는 탓에 당신보다 인생이  괴로웠다" 대꾸했지요. 그는 눈썹을 잠깐 치켜뜨더니, 짐짓 태연히  바라봤습니다. 마치 해명을 바라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저는 거리의 길고양이라도  것처럼 화들짝 놀란 척하며 날렵하게 변명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순전히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일종의 연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 놀라지도, 그다지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죠. 물론  사내도 그런  비릿한 속내를 이미 눈치채고 있더군요. 배우는 종종, 자신이 관객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관객이 먼저 배우에게 속아주며 되려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당신 또한  알고 계실 겁니다. 연극과 예술과 세계는 그렇게 완성되는 법입니다. 천박하기 그지없지만, 점잔 빼며 고상한 척하는 인간들을 필요로 하지요.

 저기, 잠시만요, 길가에 은행들이 떨어져 있으니 조심하세요. 앞만 보고 걷다가는 나도 모르게 된통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미 밟으셨군요. 냄새가 고약합니다. 나뒹구는 은행만큼이나 맛과 향이 따로 노는 족속들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잘 차려진 식탁 위에선 그 어떤 음식보다도 고소한 풍미를 자랑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제 몸에 독한 구린내를 품고 자라왔죠.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당신처럼 친절한 패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악취에 물들기 마련입니다. 자, 계속해서 걸어갑시다. 거리를 예의 주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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