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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승 Apr 08. 2021

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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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배우와 관객이요. 그래요. 실은 알면서 모르는 체하고, 모르면서 알은체 하며 살아가는 게 바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기막힐 노릇입니다. 참 그 사내 말입니까? 그는, 변명을 늘어놓는 제 솜씨에 다소 놀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군요. 그렇지만 실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내 역시 훌륭한 배우들 중 한 명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온화한 표정을 한 채 남을 경멸하는 것만큼 깨끗하고 정갈한 일은 없습니다. 저와 사내는 십여 분 정도 더 이야기 나눴습니다. 시답잖은 주제였습니다. 대체로 그는 절 경멸하기 바빴고, 전 그런 그의 시선에 명랑함을 무기 삼아 맞서고 있었죠. 먼저 지쳐 나가떨어진 건 사내 쪽이었습니다.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이며 홀연히 사라지더군요.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나니 되려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사내의 향수 냄새는 아직 자리에 남아있었거든요. 부모의 죽음, 고향의 향수, 애인과의 이별처럼 존재란 것은 사실 부재할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란 걸 알고 계십니까?

 곧 날이 저물면, 날씨가 쌀쌀해질 겁니다. 추위를 많이 타십니까? 제 하나뿐인 아버지도 추위를 많이 타시곤 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제가 자주 가는 술집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곳에서 따뜻한 칵테일과 위스키를 마십시다. 운이 좋다면 일전의 그 사내를 다시 만나볼 수도 있겠군요. 제가 소개해드리지요. 저 역시 이곳으로 거취를 옮기고 나선, 추위를 자주 느끼곤 합니다. 요즘 같은 때엔 더욱 그렇죠. 낮과 밤이 극명합니다. 하지만 쌀쌀하긴 해도 역시 밤이 좋은 이유는 바로 바람 때문입니다. 밤에 부는 그것만큼 가을을 품어낸 건 없더군요. 축축한 단풍 내음을 듬뿍 머금은 채 코를 간지럽히죠. 흙을 핥고 나무를 간질이며 구석구석 향수를 뿌려댑니다. 술독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취기를 오르게 하는 향내지요. 제게 하나뿐인 딸아이가 있단 걸 말씀드렸었나요? 딸아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제 하나뿐인 어머니 이야기를 해드려야겠군요. 둘은 서로를 모릅니다. 딱한 일이지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딸아이는, 못 본 지 오래지만, 아마 아직 살아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딸이 살아있다면, 제가 지금의 딸아이와 비슷한 또래였을 시기의 이야깁니다. 갓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였죠. 여느 그 나잇대의 아이들이 그렇듯, 저 역시 맹랑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소년병과 같은 모양새였습니다. 요령도 경험도 없던 탓에 도무지 이 세계가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혼란스런 세계 속에서 홀로 투쟁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머니께 괜한 분풀이를 했습니다. 온몸에 흙먼지 대신 골치 아픈 호기심만 잔뜩 묻혀 왔거든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툭툭 내던질 때마다, 어머니는 매번 상냥히 대답해주셨습니다. 인자하신 분이셨죠. 그렇지만 이따금씩, 간혹 돈 문제로 아버지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 날이거나, 동네 개신교 신자들에게 사이비 종교에 빠진 망할 년이라던가 이단 교주한테 몸이나 대주는 갈보년 소리를 듣고 올 적마다 어머니는 비좁은 방 한켠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하셨습니다. 불행한 가정의 아이는 쉽게 영악해진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저 역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는 날엔 짐짓 모른 체하며 괜히 어리광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럼 어머니는 금방 눈물을 훔치고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저를 품에 안아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지루한 이야기는 매번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무구한 얼굴로 늘 처음 듣는 척을 했지요. 어느 날은 화들짝 놀라기도 해 보고 또 어느 날은 신기해하기도 하면서 또 어떤 날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제 모습을 보며 마냥 즐거워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되려 얼마나 영악했는진 모르신 채로 말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순진한 모습을 보며 더욱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일종의 보호본능인 셈이지요.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그 이야기 말입니까? 지금에 와서는 전혀 색다를 것 없는 이야깁니다.

 " 세기가 바뀌는 날이 찾아오면,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리가 육지로 올라오는데,  무시무시한 뱀은 머리를 일곱 개나 가졌단다. 머리 하나하나가 모두  달린 용의 머리처럼 생겼고 입에선 바다조차 녹여버리는 뜨거운 불을 내뿜지.  짐승  마리로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하나뿐인 하나님께선, 멀리서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144,000 개의 보리 알곡들을 뱀이 나타난 바다에 뿌리시니  알곡 하나하나 칼과 방패를  천사들로 변했단다. 용맹한 천사들은 마침내 뱀을 무찌르게 되고,  공을 인정받아 하나님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가 영생과 영광을 누리게 된단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어쩌면 제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지요. 이해합니다. 세기는 바뀐 지 이십 년이 넘었고, 용맹한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죠. 저 말씀이십니까?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말로 독실한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 종착지를 일러주지요. 어머니께선, 제가 국민학교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날 투신해 자살했습니다. 당시 저는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그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세기가 바뀌려면 몇 년도 더 남아있었고, 어머니가 몸을 내던지신 곳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었거든요. 실은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긴 합니다만, 지금 그 이야기까지 하기엔 제가 몹시 피로하군요. 아니요, 슬퍼서는 아닙니다. 제 유년 시절은 불행을 자양분 삼아 발아했습니다. 그 덕분에, 쉽게 슬퍼하지 않게 됐지요. 우는 것도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달까요. 저 앞에 제가 말한 술집이 보이는군요. 어서 들어가십시다. 옷가지 대신 취기를 둘러매 몸을 녹입시다. 힘이 좀 솟으면, 제 하나뿐인 딸아이 얘기를 해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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