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은 길었고 결정은 의외로 짧았다

by 고쳐 쓰는 이작가

추석 연휴가 끝나고 난 뒤 집주인에게 계약 연장 없이 이사를 가겠다고 연락했다. 경기 광명에서 서울 구로, 다시 경기 시흥을 거쳐 김포까지. 그렇게 이어진 우리의 전세 생활에도 마침표가 찍혔다.


안 그래도 다음 집은 꼭 사자고 얘기한 터라 연초에 작성해뒀던 파일을 오랜만에 열어봤다. 지역별로 연식과 세대 수, 평형, 가격, 주차 대수, 산책할 만한 곳은 있는지를 표로 정리한 엑셀 파일이었다. 문제는 반 년도 안 된 기간 동안 가격 변동이 너무 컸다는 거였다. 부동산이 불장이라는 기사를 체감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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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눈을 돌린 건 가격 때문이었다. 엄두가 안 나긴 경기도나 서울이나 비등비등했다. ‘그돈씨’의 마법이 발동했다. 그돈씨는 자동차를 살 때 많이들 하는 말인데 ‘그 돈이면 씨X 000 산다’의 줄임말이다. 조금만 보태면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단 말이 더해지다 보면 중고 경차가 외제차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나. 다른 말로는 ‘보태보태 병’이라고도 하는데, 이 병에 우리 부부가 걸린 거였다.


경기도 아파트를 이 가격으로 사느니, 서울 외곽으로 가는 건 어떨까. 외곽이 이 정도 가격이면 서울 구축 아파트가 낫지 않나. 좀 더 보태서 지하철 역 인근이면 어떨까. 조금 더 무리하면 여기까지도 가능할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한강 뷰의 아파트를 보고 ‘이 뷰에 이 가격이면 합리적’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대출도 안 나올 텐데 돌이켜보면 참, 부질없었다.


정신을 차리는 게 중요했다. 처음 사는 집이라고 너무 무리하는 건 우리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그즈음 남편이 직장에 대한 불만이 커졌더랬다. 이는 언제든 이직을 할 수 있단 뜻이기도 했다. 일자리가 많은 지역에 자리를 잡는 게 유리했다. 대출을 갚으려면 나도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방송작가는 늘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직업이다. 특성상 대부분의 일자리는 서울 서남부에 몰려 있었고, 이곳을 벗어난다는 건 내 선택지를 스스로 줄이는 일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서울에 집을 사는 게 합리적이었다.


지역을 좁혔으니 다시금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도 필요했다. 가격이 최우선, 적어도 방 세 개는 돼야 한다는 것과 넉넉한 주차대수는 다음 순위였다. 아이가 없으니 학교와 학원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둘 다 운전을 하니 역세권은 필수 조건이 아니었다. 모두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우선순위였다. 대신 둘이서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만큼 근처에 공원이나 산이 있으면 좋겠다. 큰 맘 먹고 사는 집, 길게 살 테니 나이를 고려해 병원과 운동시설도 근처에 있어야 했다.


물론 이것은 책상 앞에서의 다짐일 뿐이었다. 직접 발품을 팔기 시작하자 모니터에서는 건질 수 없는 날것의 정보들이 쏟아졌다. 부동산 사이트를 보며 세워둔 엑셀 속 순위는 현장에서 보란 듯이 뒤집어졌다. 1순위로 염두에 뒀던 아파트는 막상 가보니 단지 전체에 서늘한 그늘이 져 뒷순위로 밀려났다. 반면, 동네를 걷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아파트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파트의 연식만큼 오래된 나무들이 단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사이로 쏟아지던 오후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다른 아파트를 봐도 자꾸만 그곳의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건 그 집이었다.


집값이 좋은 집을 구분하는 지표일 순 없다. 우리에게 맞는 집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하고 나니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발품을 팔아가며 집을 보러 다닌 기간은 보름에 불과했다. 10년 가까이를 고민했는데 결정이 너무 빨라서 허무하기까지 했달까. 지금 생각하면 뭐에 홀린 것처럼 계약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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