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샘 Sep 15. 2020

엄마는 나를 사랑할까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에게서 내가 바라는 사랑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해 무심한 척했지만 실상은 사랑에 매달리며 살아왔다. 나 자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사랑. 그게 나를 하찮게 만들어도 나는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오히려 나를 죽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사랑을 하는데 점점 말라 갔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사랑이라고 믿은 것에 매달렸다. 결국, 내가 혼자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 울면서 매달렸다.     

2019년 3월 23일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우리 예쁜 봄이. 뱃속에 품고 있을 때보다 낳고 보니 너무 예뻤다. 아니,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아이 대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온몸은 아프고, 잠도 부족하고 했다. 게다가 몸에 잔뜩 올라온 두드러기가 간지러워 긁어댄 탓에 벌겋게 상처도 났다. 그래도 아이를 보고 있으면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사랑한다는 말은 해도 해도 부족하다 느껴졌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풍부한 감정이 느껴졌다. 오래 살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귀여운 아이를 보면 기뻤고, 우는 아이를 보면 안쓰러워 가슴이 아팠다. 

‘아 이런 게 사랑이구나’

나는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찬 감정을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보며 대체로 잘 지냈다. 하지만 한 번씩 마음 한구석에선 이런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엄마는 나를 사랑할까? 이렇게 어렸을 때 나를 사랑해줬을까?’     


엄마는 나에게 양가감정의 괴로움을 알려준 사람이다. 사랑과 분노, 미움과 애틋함, 두려움과 편안함. 엄마는 나를 지옥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다. 엄마는 유쾌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불안과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고부갈등으로 인한 어려움, 자기편이 되어 주지 않는 아빠와의 다툼으로 불행한 결혼생활, 욕심만큼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의지했다. 내가 엄마의 욕구를 채워줄 거라고 기대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엄마의 위신을 세워주길 바랐다. 덧붙여 아빠와 시가에 대한 불만을 들어주고 엄마의 편을 들어주길 바랐다. 가뜩이나 불안하고 화가 쌓여 있는 엄마의 삶에 내가 걱정, 근심을 보태서는 안 됐다. 엄마는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내 성적이 본인의 기대에 못 미치면 나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 나는 잔뜩 웅크린 채로 여기저기 맞아야 했는데 방문으로 끌려 들어가며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기억난다. 방문이 닫히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매. 그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아 두렵던 어린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른들은 내리사랑이라 했다. 엄마도 종종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치사랑이 더 위대하게 느껴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한없이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이 내게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의 마음이 더 잘 보일 것이다. 아직 엄마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곧잘 얘기하곤 한다. 사실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아도 아이를 며칠 관찰해보면 안다. 이 아이는 사랑이 고픈 아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종종 나에게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기억을 털어놓는다. 그래도 마지막은 “엄마, 아빠 좋다”로 끝이 난다. 

한번은 한 여자아이가 등교하자마자 나에게 왔다. 그러더니 등교하기 전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머리를 묶어달라는 말에 엄마가 심하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서럽게 우는 아이를 나는 안아주었다. 대체 내가 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아이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해줄 뿐이었다. 

“괜찮아. 네가 미워서 그러신 게 아니야. 사실 선생님 엄마도 그랬어.”     


내 품에서 안정을 되찾은 아이는 며칠 뒤에 “엄마가 좋다.”고 했다. 

아이는 그렇다. 부모에게 상처를 받아도 아이는 부모를 사랑한다. 언제든 엄마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아이를 낳고 80일쯤 되었을 때, 인천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내가 사는 곳인 진주에서 이동시간이 네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꾸역꾸역 갔다. 아이는 예뻤지만 단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길어 외로웠다. 입에서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아이에게 계속 말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대화다운 대화가 필요했다. 퇴근 시간이 늦는 남편만 기다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마땅히 만날 사람도 없어 집에만 있으려니 우울해졌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서러움도 몰려왔다. 이 상태로 더 있다간 우울감만 깊어질 것 같았다. 

보름 넘게 친정집에 머무르며 나는 엄마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전에 갖고 있던 감정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불편함과 놀라움, 어색함, 거리감 등. 결혼하고 난 뒤 이런 감정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그 감정은 더 배가 되어 있었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불편했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보내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눈빛과 아끼는 행동, 말을 보고 들으니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묘했다. 책망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왜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느냐고. 왜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품어주질 않았느냐고. 

하지만 엄마의 이 말 한마디에 하고 싶었던 말들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너희(나와 여동생) 키울 때는 예쁜 줄도 모르고 키웠어. 둘을 혼자 재우고 기저귀 갈아입히고 하다 보면 밤이 지나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산더미처럼 쌓인 기저귀를 보니 죽겠는 거야. 둘 중 누구 하나만 데리고 가서 재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니까.” 


그러고 보니 엄마는 타지에 시집을 와 자신을 미워하는 시가 식구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야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심지어 아빠마저도 편이 되어 주지 않는 환경에서 두 살 터울의 나와 동생을 혼자 키워야 했다. 엄마의 인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면 왜 그렇게 사랑표현에 인색했었는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자식이다.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 감정이 생각난다. 하지만 한참을 더듬거리며 찾아야 한다. 그에 비해, 나쁜 기억, 감정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스스럼없이 떠오른다.      

지금은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 나름의 사랑표현임을 깨닫기엔 나는 무지했고 너무 어렸다. 그래서 참 오랜 시간,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이전 01화 배움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와 용기, 엄마라는 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