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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Oct 14. 2020

채워지지 못한 욕구가 불러온 것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정감과 사랑, 인정, 보호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를 가장 먼저 충족시켜줘야 하는 이는 바로 부모이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이를 채워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욕구를 경시하는 부모도 있다. 자신도 채우지 못한 채 살았기 때문인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그런 부모가 아이에게도 자신이 자라온 그대로의 내적 환경을 물려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욕구가 채워지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응당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줄 부모에게서 욕구를 충족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데 부모가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면 아이는 화를 내고 분노하고 실망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는 욕구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 단지 대상이 바뀔 뿐이다. 차선책으로 부모가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라도 그 욕구를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슬픈 건 부모에게서 안정감과 사랑, 인정,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는 다른 대상으로부터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욕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관심이 정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간절하게 원한 나머지 집착하게 된다. 욕구를 채우고 싶어 관심을 쏟는데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는 수가 있다. 내 경우에는 세 가지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나 자신을 경시하며 살았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니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내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상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내가 굳이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까지 밉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데도 관대하게 굴었다. 물론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불편한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에겐 이런 인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참는 만큼 사랑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돌이켜보니 그 믿음은 내가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첫 번째 대상은 역시 엄마였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는 게 기뻤다. 가끔은 힘에 부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했다”는 소리 한 마디 듣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얼굴을 보면 기뻐한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말과 행동으로 직접 느끼고 싶었다. 내가 엄마에게 기쁨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느 날부턴가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잘해도 칭찬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못하면 매와 야단만 맞을 뿐이었다. 무섭고 슬펐다. 이제는 사랑받기 위해서라기보단 생존하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미치도록 두려운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엄마의 화난 표정, 회초리를 찾기 위해 분주해지는 발소리, 방 안 구석에 처박혀 덜덜 떨며 엄마의 등 뒤로 닫히는 방문을 그저 볼 수밖에 없었던 그 공포, 위협적인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무력감. 그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나는 많은 것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감정, 욕구, 고민 등을 혼자 쌓아두며 침묵했다. 긴장으로 언제나 양쪽 어깨엔 짐을 지고 있었고, 답답함에 목이 졸린 상태로 살았다.     


그 탓에 관계도 단절되었다.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내 기대만큼 돌아오는 게 없자 마음에 상처가 곪아갔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러니한 건 사랑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에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그 관심은 내 기준에서의 관심일 뿐이었다.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타인의 사랑을 구하는 것일 뿐 상대의 속마음까지 헤아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나를 지키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 기대만큼의 보상(사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분노가 일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하니 관계가 자연스러울 리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 하거나 한 공간에 머무를 땐 긴장되고 위축되어 몸이 뻣뻣해졌다. 어디 앞에 나가서 발표하거나 누군가와 갈등 상황이 생기는 건 나에게 공포나 다름없었다. 내 의견을 말하기도 힘들었다.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만족시켜줘야 할 기대를 찾는 데에만 바빴다. 긴장은 되고, 위축도 되고,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느라 내내 집중한 탓에 사람과 만남을 갖고 나면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 기가 그야말로 쪽쪽 빨린 것 같았다.

이렇게 고생하며 좋은 관계를 위해 애쓰는데 그만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왜 날 아껴주지 않지? 내 기분을 헤아려주지 않지? 날 더 사랑해주지 않지?’ 점점 더 외로워졌다. 착하기만 한 내가 호구 같았다.     


가토 다이조의 <착한 아이로 키우지 마라>에는 착한 아이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불행으로 끌고 가는지를 설명한다. 착한 아이는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힘에 부치도록 공부하고 일하고 인내한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을 위한 남의 모습으로 사는 모순과 맞닥뜨리면서 결국에는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할까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하고 타인의 비위만 맞추다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쌓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악순환을 반복하다 결국에는 모든 관계를 단절해버리고 말았다. 나를 지켜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타인은 나를 피해자로 만드는 가해자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의 벽을 쌓았다. 더 외로워지는 길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자연스레 내적성장이 멈춰버렸다.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아이의 삶을 살았다. 나를 탐구하고 세상을 탐구하며 성장해나가는 대신 과거의 삶에 머무른 채로 어른이 되길 거부했다. 성장, 자아실현과 같은 욕구는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타인의 애정을 원했고, 어딘가에 소속되길 바라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십 대의 절반을 외롭게 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엄마에게 받고 싶은 사랑을 타인에게서 받으려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엄마에게서 내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었다. 그것은 엄마가 나의 욕구, 보호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보고도 눈 감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단지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내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엄마는 모른 척했다. 그 탓에 나는 많이 아파하고, 울고, 미워하다 체념했다. 그렇게 자랐다. 몸만 커버린 어린아이로 살며 타인에게서 내 욕구를 채울 수 있길 바라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내 욕구를 완전히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다른 누군가가 일부분 채워줄 수는 있지만 내가 채우지 못하면 언제나 나머지는 빈 상태로 불만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누군가 반드시 채워줘야만 내가 완전해질 거라는 믿음은 항상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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