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의 정치학
본부장님, 제가 담배를 배워야 할까요?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자취를 감춘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편의점 매출 1위는 담배이고,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흡연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사무실의 흡연가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무실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길 어디쯤엔가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건물들 중에는 별도의 흡연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곳도 있고, 이러한 경우 건물을 함께 쓰고 있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이들과 안면을 익히며, 눈인사 정도 하는 사이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담배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합니다. 회사를 다녀본 이들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담배가 그냥 담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담배는 해로운 기호식품에 지나지 않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업무시간 중에 사무실 밖으로 나아가 계절을 느낄 수 있는 단비와 같은 시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보 단절의 시간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알던 여성팀장이 제게 주간업무 회의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요한 전달 사항을 이미 남자 팀원들은 모두 담배를 피우면서 전해 들어 알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담배 피우는 시간과 장소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즉, 담배를 피우는 시간과 장소는 사내의 중요한 정보들이 교류되는 정보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새로운 본부로 사내이동을 하고 났더니, 이곳에서의 여성 직책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본부장을 비롯해 사업부장, 실장은 물론 남자 팀장들 대부분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이들은 회의를 진행하는 중간 휴식시간에 대부분 모두들 다 같이 우르르 몰려나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것이 당연한 의례와 같이 정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회의에서 나왔던 논의 과제와 문제점들은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그들만의 타협을 1차로 보고 회의실로 들어와서는 ‘아까 말한 대로’라며, 회의를 이어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본부장을 찾아가 저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본부장님, 제가 담배를 피워야 하는 걸까요?” 저의 엉뚱한 질문에 본부장은 저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걸 왜 제게 묻나요? 담배 원래 피우셨어요?” 물론, 저는 아니라고, 제가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회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리더인 제게 그 누구도 같이 가자고 곁을 내어주는 이가 없는 상황 속에서 저는 이 공고한 카르텔을 어떻게 하면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가 고민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그러한 사소하고, 무신경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소외를 조장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의 이 엉뚱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질문은 그들에게 분명 아주 불편하고, 불편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본부장이 제게 준 답변은 제가 업무의 주도권을 잡고, 업무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담배 피우는 시간을 줄일 것이고, 저를 담배 피우지 않는 장소로 초대해 커피를 살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부장의 이 말은 제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즉, 저는 아직 그들의 이너써클에 초대된 정식 멤버가 아니라는 사실과 제가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저의 명확한 업무영역을 발견하고, 장악해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담배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었지요.
여성 리더들은 유독 업무능력과 성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성들에게는 너그러운 업무능력을 여성들에게는 무엇이라도 하나씩 더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남성 중심의 조직 메커니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들은 유독 일의 능력에서는 스스로에게 엄격합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무조건 일을 잘하는 남성들만 리더가 되었을까요?
리더가 되어 연말 인사평가 시즌이 되면, 누구나 같은 고민에 직면하게 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한 해 농사를 열심히 짓고, 내게 조직의 성과를 가져다준 성실한 팀원이 있는가 하면, 업무 성과나 능력은 탁월하지 않았지만, 고된 직장생활에 든든한 내편이 되어준 이도 고맙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는 연초 리더십 특강에 초대되어 온 강연자가 소개한 에피소드와도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요즘은 흡연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흡연 연령은 낮아지고, 여성들의 흡연 역시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즉, 담배의 정치학은 남성과 여성의 젠더 갈등이 아니라 네트워킹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답은 없겠지만, 밤새 술자리로 다져지는 전우애에서도 열세인 여성들에게 담배를 매개로 한 스몰 토크의 파워풀한 끈끈함을 압도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여성들은 더욱 성과와 실적에 목을 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본부 회의체를 운영하는 내내 저를 불편하게 했던 회의 막간의 흡연 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은 회의시간 막간의 브레이크 타임,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