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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프 Sep 08. 2023

지천명, 그 불안과 우울을 건너는 법

잘해왔다는 자기 위로와 잘될 거라는 자기 확신을 딛고

정확한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을 다녀온 지 정확히 4주가 지났습니다. 모든 일이 매끄러웠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몇몇 껄끄러운 시간들을 건너 저는 이제 병가 3주 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부 덕분에 올해 다시 지천명, 50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50은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구간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대기업에서 받은 월급이면 노후준비를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냐고. 하지만, 대한민국 그것도 대치동에서 아이를 키워본 학부모라면 알 것입니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모두가 아이의 입시만을 위해 달려온 삶이 얼마나 값비싼 사교육비를 지불해야만 가능한지 말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이 입시 전쟁을 치르고 나니, 저는 이미 50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나이가 주는 숨 막히는 압박감은 곳곳에서 이미 제 삶의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저는 미처 그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면의 날들은 출근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했고, 점차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신문기사에서 보는 M&A는 기업들이 더 높은 수익을 위해 기업의 일부 혹은 사업부를 사고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M&A는 사업만을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큰 변화를 겪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하루아침에 일하는 방식이 다른 두 가치의 문명 대충돌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의 혼란은 수많은 사내 정치와 줄 서기, 갈등 관계를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단언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M&A 한 기업에 좋은 조건으로 재취업을 한다거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면, 얼른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분명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문명 대충돌의 아노미와 카오스의 구간에 들어간 기업에서 성장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PMI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에서 만 4년을 버티다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하는 방식과 언어가 다른 조직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은 스스로를 점점 더 고립시키고,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인 반면, 어느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50, 경제적으로 불안정할 구간이 바로 코앞에 바짝 다가왔고, 열심히 살아온다고 살아왔는데, 불현듯 돌아보니, 별로 해둔 것은 없으며, 건강은 갱년기와 회사인간의 종말이라는 두 가지 현실 앞에 한없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난 과거에 대한 거대한 우울을 탓하며, 인생을 낭비하기에 저는 여전히 너무나도 젊고, 오늘은 제 생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문득 저는 혼자서 힘들게 달려왔지만,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그것만으로도 너는 대단하다고 나 자신에게 속삭여주고 싶어 졌습니다. 이는 당신만 힘든 게 아니라고, 당신만 혼자가 아니라고, 이런 삶도 있다고, 그러니 당신도 기운을 내라고 누군가 인생의 험난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 졌습니다.


숨차게 달려온 당신의 시간들이 그리 헛된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 당신은 더 잘할 수 있다고, 내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인생은 특별할 게 하나도 없지만, 우리 모두는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함께 용기를 내자고, 그리고 미래의 불안과 과거의 우울을 떨치고, 지금의 우리 삶을 살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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