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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살았습니다

— 무너진 날들과, 다시 살아진 날들 사이에

by 박세신

1. 살아지는 날보다, 살아내야 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사는 일은 예전엔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는 줄 알았습니다.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이 되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는,
그런 단순하고 평온한 리듬이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삶은 그렇게 다정하게 흘러주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눈을 뜨는 행위 자체가 버거웠고,
숨을 한 번 더 쉬기 위해 마음을 추스르는 데
하루 전체의 에너지를 쓴 날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인내들을 자주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세상이 요구하는 대단한 용기를
반드시 갖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버팀들이
저를 견디게 해주는 날이 많았습니다.


살아지는 날보다
살아내야 하는 날이 더 많다는 사실을
저는 그제야 배워갔습니다.


2.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말로 꺼내려 하면
도리어 그 시간이 다시 현실이 될 것 같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그 시절의 저는
“말하면 달라질까?”라는 질문 앞에서
수없이 멈춰 섰습니다.


말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오히려 더 다칠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견디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는
말보다 더 큰 아픔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이 미묘하게 저려왔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고,
버티는 것조차 벅찼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저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내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얼마나 애썼는지
뒤늦게 조금씩 이해해갔습니다.


그 시절은
내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치열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3. 한때, 삶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때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가족이었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 사건은 제 삶의 기둥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믿음이 무너질 때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변합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7년을 치료받았습니다.
그 시간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무너진 마음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불안, 분노, 공포, 상실감.
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꽉 움켜쥐고
숨 쉬는 법조차 어렵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때
감정이 죽어 가는 느낌을 경험했습니다.


무기력해지고,
기쁨은 둔해졌고,
사람을 믿는 일은
마치 낡은 문을 억지로 여는 것처럼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음 한쪽에는
아주 옅지만 지울 수 없는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국은
예전처럼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그 자국은

“내가 그때도 살아 있었다”는 조용한 증거이자,
내가 지나온 길을 기억하게 해주는 흔적일 뿐입니다.


4. 감정이 죽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이후의 저는
내 감정이 많이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쁨은 쉽게 올라오지 않았고,
슬픔은 오래 머물렀고,
사람을 향한 마음은
자꾸 한 발 뒤로 물러서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감정이 죽은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뿐이라는 걸.


예전엔 쉽게 흔들렸지만
지금은 흔들림을 조용히 바라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감정이 나를 끌고 다녔다면
지금은 내가 감정을 한 발 뒤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상처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특별한 온도였습니다.


아주 차갑지도,
아주 뜨겁지도 않은,
삶을 견뎌본 사람들만 갖는
묘한 따뜻함 같은 것.


5.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제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상처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을 무렵
저는 한 번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제 삶에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말을 재촉하지 않는 사람,
괜찮다고 말할 때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
아무 말 없이도 함께 있어주는 사람.


삶은 참 이상합니다.


한때는
사람이 무서워서 세상을 피했던 내가
지금은 많은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상처는 사람을 고립시키지만
시간은 사람을 다시 사람 곁으로 데려옵니다.


저는 그들을 통해
다시 사람을 믿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시 따뜻함을 느끼는 법을 배웠고,
다시 관계라는 걸 바라볼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과해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조금은 다시 살아진 사람이 되어
그들 곁에 서 있습니다.


6. 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삶은 끝까지 ‘살고 싶어서’만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그 시절의 저는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살아졌습니다.
그저 하루를 이어 붙였을 뿐인데
그 하루들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버티기 위해 살았고,
나중엔 회복하기 위해 살았고,
지금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삶은 한 번도
저에게 거창한 의지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를 지우지 않고 버티는 마음을
조용히 바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간이
결국 나를 구했습니다.


살아내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용기가
아주 깊은 곳을 지켜주었습니다.


7. 그럼에도 살았습니다


돌아보면
삶은 저를 흔든 날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러나’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았습니다.


울면서도 살았고,
무너진 채로도 살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던 날에도
그 자리에서 버텼습니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어떤 날에는 성취이고,
어떤 날에는 용기이며,
어떤 날에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고,
흔들리기도 하고,
가끔은 멈춰 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
오늘의 저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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