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감정을 말로 설명하는 일이 늘 어려웠습니다.
말은 순간에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라
제 마음을 온전히 담기에는 너무 빨랐습니다.
어떤 감정은 말을 꺼내는 순간 흐려졌고,
또 어떤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보다는
기록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글 속의 저는
말보다 더 솔직했고,
말보다 더 정확했고,
말보다 더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감정들을
글은 조용히 받아주었습니다.
해석 없이, 판단 없이,
그냥 “여기에 남겨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저는
말하지 못한 것을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글은 제 감정의 대기실과도 같았습니다
어떤 감정은 바로 쓰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쓰면 망가질 것 같고,
아직은 글이 감당하기엔 너무 날카로운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속에 작은 대기실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대기실에서 감정들은
조금씩 식었고,
정리되었고,
때로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이 오면
그 감정은 글이 되었습니다.
글은 감정을 버티는 시간이었고,
감정이 자신을 설명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대기실 덕분에
섣부른 감정의 폭발을 피했고,
말로 내뱉으면 후회할 순간들을 버텼습니다.
글은
저를 지키는 창이었고,
저를 묶는 족쇄가 아니었습니다.
3. 잘 쓰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늘 조금 어색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잘 쓰기 위해’ 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기 위해,
견디기 위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쓰러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잘 쓰는 법을 고민한 날보다
“오늘도 버티기 위해 쓴다”라고 중얼거리며
책상에 앉았던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글을 취미로 쓰고,
누군가는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씁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잃지 않기 위해 썼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제 마음이 한 줄로 정리되었고,
감정이 숨을 고를 수 있었고,
혼란이 하나의 방향을 갖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글은
도구나 취향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4. 글은 제 안의 가장 조용한 부분을 살려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격이 반영된 글을 쓴다 말하지만
저에게 글은
성격보다 더 깊은 곳을 드러냈습니다.
일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속도,
말로 하면 오해받는 감정의 결,
자신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들.
이 모든 것들이
제 글 안에서는
가장 정확하게 살아났습니다.
글은
제가 평소에 하지 못한 말들을 대신 말해주었고,
제가 인정하지 못한 감정까지도
부드럽게 끄집어냈습니다.
그 과정이 때로는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저는 제가 누구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글의 형태로 남겨진 감정은
더 이상 제 안을 맴도는 그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형태가 있고, 이름이 있고,
부재가 아니라 존재가 되었습니다.
글은
저를 발견하게 하는 가장 조용한 도구였습니다.
5. 글을 쓴다는 건 버티는 일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때는 버티는 일만 남는 날이 있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고,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날들.
그럴 때 저는
글을 썼습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저를 다시 세우는 글이었습니다.
“오늘도 살았다”는 증거.
“오늘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기록.
그런 의미에서
글은 버티는 일과 닮아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는 다시 제 호흡을 찾을 수 있었고,
감정이 무너지는 시간이
천천히, 조금씩 뒤로 밀렸습니다.
삶에서 버티는 힘이
글에서 나왔는지,
글을 쓸 수 있게 만든 힘이
삶에서 나왔는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둘은 서로를 지탱하는
하나의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6. 그럼에도 썼습니다
저는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 말도 쓰고 싶지 않았고,
어떤 날은 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쓰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
제 마음이 더 불안해졌습니다.
마치
글을 쓰지 않으면
제가 저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럼에도 저는 썼습니다.
누가 읽어주는지 상관없이,
얼마나 잘 쓰는지 신경 쓰지 않고,
오늘의 문장이 내일 부끄러워질지 고민하지 않은 채.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마음들을
하나씩 구해내듯이.
글이 저를 구한 것이 아니라
제가 글로 인해
제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도 씁니다.
내일 흔들릴 나를 위해,
오늘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이 기록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조용히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저는 썼습니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제가 글을 썼기에
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