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말 사이
1. 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늘 말을 조심스러운 속도로 꺼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질문을 던지면 바로 대답하기보다
입술 안쪽에서 몇 번이고 굴려보고,
머릿속에서 한 번 더 다듬어보며
그 말이 정말 맞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이 빠르고 명확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금방 대답하고, 압도적으로 설득하고,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늘
'말할까 말까'를 먼저 고민했고,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를 한참 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말이 타이밍을 잃으면
그냥 입안에서 천천히 사라지게 두었습니다.
말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제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말보다 침묵에 더 익숙했고,
침묵 속에서 마음이 더 분명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때때로
저를 고립시키는 무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말하지 못해 오해를 만들고,
침묵 때문에 감정이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말을 하지 않아 상처를 줄이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않아 나를 지키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말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2. 말하지 않았던 이유들
제가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말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말에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은 상대를 향하는 동시에
언제나 저에게 되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저는 종종
말이 상처가 될까 봐,
말이 틈을 만들까 봐,
말이 내 마음을 너무 많이 드러낼까 봐
입을 닫았습니다.
솔직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솔직해지는 건 늘 어려웠습니다.
솔직한 말은 정확히 마음의 형태를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잘못 닿으면
돌이킬 수 없는 오해가 되고,
잘못된 타이밍에 놓이면
그 말이 내 의도를 훼손하는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말하지 않고 버티는 방법을 더 빨리 배웠습니다.
대답을 피하는 법을 배웠고,
삼키는 법을 배웠고,
손끝에서 흔들리던 문장을 마음속에서만 정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언제나
제 감정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대신,
무겁게 내려앉아 제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잃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3. 말은 상대에게 닿기 전에 먼저 나를 스칩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말은 상대에게 닿기 전에
먼저 나를 지나간다.”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 고민하는 순간,
저는 가장 먼저 제 마음과 마주했습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 말을 통해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과정은 곧
제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을 하려다 삼킨 것도,
말을 머릿속에서만 여러 번 부연한 것도
결국 그 말이 타인을 향하기 전에
먼저 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은 저에게
‘마음의 모양을 먼저 확인하는 행위’ 였습니다.
말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말은 어려웠습니다.
말은 곧 나를 드러내는 일이었으니까요.
4. 말하기와 침묵 사이에서
저는 말보다 침묵을 선택한 날들이 많았습니다.
침묵은 안전했고,
침묵은 상처 주지 않았고,
침묵은 저를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동시에
저를 가두는 문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나를 오해하는 목소리가 쌓여 갔고,
말하지 않으면
내 마음의 모양이 바깥에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건
또 다른 무서움이었습니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저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어떤 날은
말하지 않아서 후회했고,
어떤 날은
말해서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알게 됐습니다.
‘침묵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지킨다.’
침묵은 감정을 숨겨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더 무겁게 하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제 마음은 말하지 않을수록 고립되었고,
저는 점점 ‘나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사람’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말하는 건 ‘용기’라기보다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5. 저는 말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조금은 늦었지만
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 서툴러도,
말이 부족해도,
말이 때로는 돌아나가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말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저는 이제 압니다.
어떤 말은 서툰 채로도 닿고,
어떤 말은 굽은 채로도 전달됩니다.
말의 가치는
얼마나 내용이 정교한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심이고, 확신이 담겨있는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기로 했습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힘들었다고.
말은 저를 잃지 않게 해주는 방법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보다
내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툼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을 선택했습니다.
6. 그럼에도 말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말이 빠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감정을 말로 꺼내는 건 어렵고,
누군가의 표정을 읽으며
이 말이 괜찮을지 계산하는 버릇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말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마음이 있었고,
말하지 않으면
저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순간
제 마음은 형태를 갖게 되었고,
그 형태는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말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제가 저에게 남기는 신호였습니다.
“나는 오늘도 나로 살고 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입술을 조심스럽게 여는 사람입니다.
서툴러도 괜찮다고,
표현이 부족해도 괜찮다고,
그럼에도 말하는 것 자체가
나를 지키는 일이니까요.
저는 그럼에도 말했습니다.
오늘을 버티기 위해,
내일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