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나를 다시 불러 세운 자리에서
1. 실패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실패를 큰 사건처럼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가 한 번에 무너져 내리고,
삶의 방향이 뒤집어지는 그런 장면만을 실패라고 믿었죠.
하지만 인생에서 만난 실패는
그렇게 극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는 천천히 스며오는 물 같았습니다.
어떤 날은 그냥 작은 균열처럼 다가왔고,
또 어떤 날은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를 ‘사건’이 아니라
‘상태’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어느날 문득,
“아, 내가 여기에 있었구나.”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서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제가 실패를 힘들어했던 이유는
실패 자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저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실패가 아니야’라고 우겼습니다.
그런 노력은 오히려 실패를 숨긴 채
제 안에 더 깊게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날은
모든게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해 온 것들이 맞는지 의심이 들고,
누구도 모르게 혼자 뒤에서 무너지는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슬픔이나 후회보다
‘당혹감’이 더 컸습니다.
저는 실패했는데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겁니다.
3. 실패는 제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실패 안에서 저는
제가 아닌 모습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들을 뱉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표정을 지었습니다.
부정적이고 날 선 마음들이
어느새 제 안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성공이 사람을 꾸며주는 시간이라면,
실패는 사람을 벗겨내는 시간이라는 것을.
실패 앞에서
저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는
저를 잔혹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솔직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제가 생각보다 약하고,
생각보다 조급하며,
생각보다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실패는
저를 작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4. 실패는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만, 멈추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실패를 경험하면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시작하자.”
하지만 저는 그렇게 빨리 다시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실패 뒤에는
잠시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멈춘다는 건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방향을 잃었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멈춘 자리 위에서
저는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았고,
누구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저 제 발밑을 바라보고
그 날의 제 감정을 바라보는 일.
그게 제가 실패에서 다시 일어나는 데
가장 필요했던 과정이었습니다.
5. 실패의 반대말은 성공이 아니라 ‘나아감’이었습니다.
실패의 반대말은 성공이 아니라
나아감이라고 느꼈습니다.
실패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 것인지,
그 자리를 지나갈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넘어졌다는 것은
아직 길 위에 서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길이 끝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를 부끄러움이 아니라
움직임의 증거로 보게 됐습니다.
6.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수없이 실패했습니다.
어떤 실패는 길게 남아서
지금도 마음 한쪽을 조용히 눌러 앉아 있고,
어떤 실패는 시간이 지나
조용히 봉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실패가 가르쳐 준 사실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실패는 나를 멈추게 했지만,
멈추게 두지 않았다는 것.
지금의 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더 이상
저를 부정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저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또 하나의 문장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 덕분에
저는 제 자신을 조금 더 정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