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도착하는 마음의 자리
멍.
그건 생각이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혹은 너무 깊어져서
더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을 때
마음이 잠시 머무는 자리에서 나는 소리다.
멍은 공백이 아니라
감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다.
비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 채워져서 더 담을 수 없을 때 찾아온다.
하루를 지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감정들이 한 사람에게 스친다.
흔들리고, 지우고, 다듬고, 건드리고, 깨닫고, 놓고, 일어나고,
때로는 마음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어떤 순간은 장면처럼 고정되기도 한다.
그 모든 움직임이 겹치고 엉키다 보면
감정의 방향이 잠시 멈출 때가 있다.
그때 마음은 멍— 하고 조용히 앉는다.
사람들은 멍을 종종 무기력으로 오해한다.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이고,
아무 말도 안 하기 때문이고,
아무 느낌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찰해보면 멍은
무기력이 아니라 감정이 가라앉는 깊이에 가깝다.
물 위에 떠 있던 먼지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도
안쪽에서는 조용히 어떤 변화가 진행된다.
멍은 겉으로는 멈춰 있지만
마음의 바닥에서는 아주 미세한 정리가 이루어진다.
멍의 순간에는 판단이 없다.
좋다, 나쁘다,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방향도 마음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멍은 위험할 정도로 평온하다.
어떤 결론도 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평온 속에는
에너지가 다시 모이는 준비가 숨겨져 있다.
찰칵이 마음을 고정시키는 소리라면
멍은 그 고정된 장면 위에
시간이 천천히 내려앉는 소리다.
닫힌 문 앞에서
당장 열지도 못하고
뒤돌아가지도 못한 채
잠시 서 있는 상태.
그 자리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일이 잠시 멈춰 기다리는 중이다.
멍은 때로,
감정이 너무 아파서 잠시 쉬어가는 순간에 찾아온다.
‘왜 이렇게 힘들지’라는 생각조차
더는 작동하지 않을 때.
사각사각 갉아먹던 것들이
잠시 더 이상 깎이지 않을 때.
찰칵 닫힌 마음이
더도 덜도 움직이지 않을 때.
그때 마음은 멍— 하고 눕는다.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움직였다가는 부서질 것 같아서.
또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말들이 지나간 후
너무 많은 생각이 쌓인 후
너무 많은 선택이 겹친 후
마음이 스스로를 비우기 위해
멍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건 포기와도 다르고
회복과도 다르다.
그저
“잠깐만”
하고 붙잡혀 있는 상태다.
그 짧은 숨 고르기 안에서
사람은 이상하게도
조금 살아난다.
누군가가 위로해줘서도,
문제가 해결돼서도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몇 초가
사람을 다시 사람이게 만든다.
멍은 비움의 기술이 아니다.
멍은 자연스러운 기절이다.
감정이 너무 많아 잠깐 쓰러진 마음의 쉼.
이 쉼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되돌려준다.
멍을 지나고 나면
같은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정리된 건 아니다.
해답이 생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질 듯한 무게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다.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멍은 사람을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진 않는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아주 작은 휴식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주 미세하게 숨이 들어오고
가라앉았던 감정들이 조금씩 떠오르고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힘주지 않은 상태로 느슨해진다.
그때 사람은 알아차린다.
아, 멍이 끝났구나.
이제 다시 움직일 수 있구나.
멍은 마지막이 아니다.
멍은 끝에 도착한 마음이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멍—
그 소리는
마음이 잠시 세상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소리다.
멍—
그 고요한 자리에서
다음의 나가 천천히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