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존재_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존재들의 이야기 - 02화
“삐- 삐-.”
핸드폰 알람을 쓸어 넘기고 머리를 쥐면서 일어났다.
“으… 머리야…”
전날 마신 술이 문제였을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스트레스 가득한 회사일, 그리고 이어지는 회식…
그리고…
‘……?’
갑자기 어제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 어제 차에 치여서 쓰러졌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마지막에 횡단보도에서 어떤 차량이 나를 덮친 기억이 있다.
붕— 하고 날아가며 시야가 뒤집히고 운전자가 뛰어오던 장면까지 떠오르는데, 어떻게 된 거지?
온몸을 뒤적거렸지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어차피 흐릿한 기억, 꿈인가 보다 하며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양치질을 하다 보니 짜증이 밀려온다.
‘하… 지긋지긋해. 이번 달까지만 하고 진짜 사직서 낸다.’
가방 속 사직서를 다시 한번 주섬거리며 길을 나섰다.
매일 반복되는 지옥 같은 지하철, 땀 냄새, 이 과장의 잔소리, 돈도 없는데 더럽게 비싼 똑같은 점심, 야근, 회식… 너무 지겹다. 사는 게 의미가 없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통장 잔고는 제자리였고, 10년 동안 이름표 하나 바뀌지 않았다. 10년째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다는 무기력감이 올라왔다.
‘어렸을 적 내 꿈은 뭐였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고 잠이 들었다.
“삐- 삐-.”
핸드폰 알람을 쓸어 넘기며 욕이 튀어나왔다.
“그래, 일어난다, 일어나!
내일이 월급날인데, 하루만 더 참고, 사직서 꼭 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오늘도 지하철에 탔다.
이놈의 지하철은 매일 타도 싫다. 앞사람은 가방을 또 왜 이렇게 큰 걸 멘 건지…
회사에 도착하니 이 과장이 할 잔소리에 숨이 턱 막힌다. 잘하면 잘했다고 해주지, 마음에 들면서 역정.
못하면 못했다고 역정. 눈에 안 띄고 싶어 조용히 일만 하면, 사람이 매력이 없다고 역정.
“하… 진짜 이번 달까지 만이다.”
이번엔 진짜라며 다짐했다.
‘그래도 서 대리는 나랑 참 잘 맞았는데, 아쉽네.’
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 마침 서 대리가 와서 인사를 건넸다.
“박 대리,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회식이 길어져서 힘들어 보이던데, 괜찮아요?”
“에휴,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서 대리는 어때요?”
라고 말을 건네는데, 서 대리의 말소리가 저 너머로 들리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라? 어제는 회식이 없었는데… 서 대리가 그저께를 착각한 건가?’
나는 서 대리의 말을 끊으며 급하게 말했다.
“그런데 서 대리, 우리 어제 회식 없었잖아요? 그건 그저께 일 아닌가요? 서 대리도 참, 하루가 너무 빨리 가버리니까 헷갈리나 보다.”
서 대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네?, 무슨 소리예요? 우리 어제 3차까지 가서 부장님 택시 잡아드리고 겨우 빠져나왔는데, 미래에서 왔어요?”
서 대리가 허허허 웃으며 말했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건 나였다. 우린 분명 그저께 회식을 했고, 흐릿하지만 차에 치이는 꿈을 꿨고, 어제는 진짜 의미 없지만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하루를…라고 기억을 더듬는 순간 떠올랐다.
‘어? 서 대리와의 이 대화, 어제도 한 것 같은데?’
이상하다. 어제의 하루도 꿈일 리가 없다. 나한테 진짜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병원에 가봐야 하나? 찰나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계속해서 자신의 말에 대답이 없고 멍 때리는 내 모습을 본 서 대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박 대리, 힘내요. 내일모레면 월급날이잖아요.”
‘그래, 내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모레면 월급…?’
위안을 삼으며 평온해지려던 순간, 나는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너무 말도 안 되고, 의심스러워서 다급하게 서 대리를 붙잡고 말했다.
“서 대리! 오늘이 10월 18일 맞아요? 19일 아니고?”
서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박 대리님 진짜 미래에서 오셨나 보네. 당연히 18일이죠. 진짜 몸이 안 좋으면 오늘은 병가 내세요. 그러다 큰일 나요.”
그러고는 자리에 앉는 서 대리를 멍하니 보며 나는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
‘내가 어제의 하루를 통째로 꿈으로 꿨다고? 그럴 리가 없어. 난 분명 실제로 어제 하루를 보냈다고!’
난 분명 19일을 보냈다. 그래서 다음 날 월급날이니 하루만 참자고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오늘이 18일이라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만약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제와 똑같은 하루라면, 분명… 아,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그래! 최 부장님! 최 부장님이랑 면담을 했지. 다행히 별말씀 없으셨어. 그냥 지금처럼만 하자는 말씀이었는데…’
설마 하며 초조하게 시계만 쳐다봤다. 시계가 10시를 가리키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 대리, 나랑 면담하자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허허 이 사람,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왜 그러고 있어? 별일 아니니 얘기 좀 하세.”
부장님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박 대리가… 그래서… 하고… 알았지? 박 대리? 듣고 있나? 허, 이 사람 참 넋을 놓고, 나가게.”
“네. 감사합니다.”
힘이 쭉 빠진 채로 툭 한마디 뱉고 자리를 떴다. 분명 어제 말씀 그대로다.
‘아냐, 그래도 조금 더 확신이 필요해.’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메일! 메일이 한 통 기억난다.
거래처에서 고맙다는 내용의 메일이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 아마 3시쯤 왔던 것 같다.
'없다! 어제 분명 받았는데?'
‘……’
3시 10분이 되고 메일이 도착하자, 확신이 들었다.
‘확실하다. 난 분명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혼란스러웠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쩌면 차에 치인 것이 현실이고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옥상에서 떨어지면 꿈에서 깰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지금이 현실이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하기 싫었다.
‘아… 모르겠다. 일단 퇴근하고 쉬자.
정말 하루가 반복되는 거라면,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었다.
“삐- 삐-.”
어김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을 급히 끄고 날짜부터 확인했다.
“18일!”
18일이었다. 분명하다. 나는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됐다.
“이럴 수가… 이게… 가능해? 완전 영화잖아!”
‘잠깐, 정말 반복되는 하루라면…? 늦잠이나 자자.
푹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쿵 하며, 두려움과 의아함이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회사를 안 갔다. 일어나니 오후 1시였고,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었다.
“어쩌라고, 오늘은 내 마음대로다!”
라고 말은 뱉었지만, 아직은 불안함이 있었다.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만약 내일 하루가 다시 시작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윽고 합리화했다.
“됐어. 어차피 관두려던 회사, 누군가 도와줬다 생각하지 뭐! 잘 됐다!”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보며 뒹굴거렸다. 주말도 못 쉬고 일만 하던 내게 정말 달콤한 하루였다. 제발 내일도 반복되길 바라며 잠들었다.
“삐- 삐-.”
‘아차, 알람 끄는 걸 깜빡했네… 아…’
그냥 꺼버린 알람을 뒤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짜를 확인했다.
“하하… 이거 진짜잖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허탈한 미소와 기쁨이 올라오며,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밀린 넷플릭스를 봤는데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날짜를 셀 필요도,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돈을 마음대로 써도 다음 날이면 다시 돌아왔다. 아쉬운 건 잔고가 없어서 큰돈을 쓰지 못했다.
그래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됐다. 내 세상이었다.
‘내 세상? 잠깐… 돈을 왜 쓰지?’
내 안의 검은 욕망이 속구 쳤다. 어차피 다시 돌아오는 하루, 이 세상의 주인은 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돈은 의미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비싼 레스토랑을 갔다. 온갖 메뉴를 다 시키고 맛있게 먹었다. 너무 많이 시켜 반쯤 먹었을 때 이미 배불렀고, 화장실 가는 척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렇게 해도 다음 날이면 아무도 나를 찾을 사람이 없이 오늘의 하루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이 기뻤다.
저녁엔 비싼 술집에 가서 제일 비싼 위스키를 시켜 마시며 마음껏 놀았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가려는데 가드가 나를 붙잡았다.
‘아차, 몰래 도망갔어야 했는데. 깜박했다. 그냥 오늘은 돈 내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며 카드를 꺼냈다.
“손님, 죄송하지만 한도 초과네요. 다른 카드를 주시겠습니까?”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살기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서를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2천만 원이요? 아니, 무슨 술값이… 잠시만요, 그러니까, 음, 하…”
내가 말을 못 하고 횡설수설하자, 가드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손님, 혹시 돈이 없는데 이렇게 대책 없이 드신 건가요? 아, 곤란한데, 갑자기 화가 올라오네?”
눈을 부릅뜨며,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 이미 몇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현실이 됐다. 흠씬 두들겨 맞고, 모든 소지품을 다 뺏기고, 온갖 협박을 다 받고, 돈을 지불하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집에 오니, 화장실 거울에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내 세상인데, 여전히 난 시궁창 인생 속이네.’라는 생각이 드려는 순간, 분노가 차올랐다.
‘잠깐, 내가 왜 이렇게 맞아야 하는데? 그냥 다 뒤엎고 갔어도 오늘이 지나면 끝이잖아, 멍청아!’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나를 때린 놈에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게 분노로 가득 찬 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내일 그 녀석은 죽었어. 그대로 갚아주마.’
여전히 똑같은 18일이 반복됐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나는 어제 그 술집이 문을 열자마자 쳐들어갔고, 다짜고짜 가게 안의 위스키 병으로 그 가드의 머리를 내리쳤다.
선홍빛 핏줄기가 솟구쳤고, 깨진 술병과 피, 위스키가 내 손에 엉겨 붙었다. 손도 다친 듯 욱신거렸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가게 안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비명소리가 이어졌고, 난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곧바로 집으로 도망 왔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붙잡으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지금 씻고 있는 피가 내 피인지, 그 녀석 피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내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그 녀석 머리에서 뿜어지던 피처럼 솟구쳐 올랐다.
‘이 떨림… 두려움? 통쾌함? 왜 이렇게 익숙하지? 마치 한 번 해봤던 것처럼.’
그 녀석이 죽었을까? 뭐 어떤가. 내일이면 또 어제가 되겠지.
나는 내일을 기다렸다. 내일이 다시 어제가 되는 그 순간을. 그렇게, 잠들었다.
아침이 되자, 숙취도 상처도 없이 깨끗했다.
나는 메모하듯 정리했다.
첫째, 모든 건 18일로 되돌아간다.
둘째, 되돌아가기 전까지의 오늘은 전부 현실이다. 다치면 아프고, 죄를 지으면 현행범으로 잡힐 것이다.
셋째, 죽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결론, 단 하루지만 계획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내 지난날도 떠올랐다.
‘정말 힘들었는데…’
그러다 문득 머릿속이 하나로 모였다. 내 장모였던 사람.
그래, 내 삶이 이렇게 돼 버린 원흉이자 원수다.
한때 나는 사장이었고, 다정한 가장이었다. 처가의 빚을 도우며 살았다. 돈은 아내와 장모에게 맡겼다. 회사가 흔들리자 장모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고, 말다툼은 일상이 됐다. 결국 이혼, 파산, 양육권 상실. 내 이름으로 남은 건 장모가 썼던 카드빚과 판결문 한 장, 10년의 제자리. 오늘은 그 종착지다.
나는 내 안에 묻어 두었던 단어 하나를 꺼냈다. 복수.
그동안 묻어뒀던 분노가 매일 반복되는 이 하루에 다시 피어올랐다. 현실이 끝없이 돌고 있다면, 나도 그 안에서 돌뿐이다. 어차피 멈출 수 없다면, 부서지기로 했다.
단, 나는 잔혹을 즐기지는 않는다. 다만 고통의 무게를 알게 하고 싶을 뿐—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말과 마음은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남이 나를 밀었다.
그날 나는 차 한 대를 훔쳐 그녀의 집 근처를 맴돌았다. 낮게 깔린 분노가 핸들에 전해졌다. 차 한 대가 골목을 빠져나왔다. 잠깐이지만 차 안에 비치는 그 얼굴에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충돌, 비명, 혼란. 나는 우발과 계획 사이 어딘가에서 움직였다. 이성보다 손이 빨랐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어둠 속 의자에 묶여 있었다. 내 숨이 빨라졌다. "말은 필요 없다." 나는 중얼거렸다.
불빛이 스쳤고,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나를 알아봤다. 입은 막혀 있었지만, 눈이 말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익숙하다는 생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이 상황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마치 한 번 해본 것 같잖아?'
나는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질러 버렸네 흐흐-.” 스스로에게 말했다. 연기를 토하는 사이, 안쪽에서 흐느낌 같은 소리가 났다.
그날 밤, 모든 것은 끝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욕실 거울 속 내 얼굴은 멀쩡했다. 손만 조금 떨릴 뿐.
‘두려움? 통쾌함? 공허?’ 감정들이 서로를 밀치며 올라왔다. 내일을 기다렸다.
다음 날, 모든 것은 지워져 있었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복수를 하고 나니 시원함보다 찝찝함이 밀려왔다. 그 끈적한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한 마디가 나왔다.
“허무하네.”
그렇게 증오하던 상대가 죽어버렸다는 생각에 허우적대다가, 문득 깨달았다.
‘잠깐, 그 여자 오늘 또 살아 있네?’
나는 내가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뒤로 매일 찾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죽였다. 내 한이 다 풀릴 때까지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걸 쏟아내고 나니 지난 설움과 아픔이 몰려온 걸까, 아니면 아무리 죽여도 변하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을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여느 때처럼 눈을 떴다.
이제는 알람이 없어도 아침이면 눈이 떠진다.
날짜는 여전히 10월 18일.
놀랍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 나를 오래 바라봤다.
나는 도대체 몇 번째의 나일까.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뭐 하지. 다 죽였는데."
그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자, 가슴 한가운데가 이상하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계속되는 복수에 모든 게 개운해지자 밀려오는 허무함은 처음보다 더욱 커졌다.
그렇게 비워내고 무뎌지자 문득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 나도 잘 한건 없었는데… 내 복수심에만 사로잡혀 중요한 걸 놓쳐왔구나… 그냥 한 번 찾아가 보자.‘
그녀의 집으로 다시 갔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손에는 담배 한 개비, 라이터 하나.
불을 붙일까 하다 말았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를 봤다.
그 순간,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여기는 왜?”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어리석었어요.”
그 말이 의도치 않게 나왔다.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한마디가, 내 루프의 수많은 날들보다 길게 느껴졌다.
돌아서서 걸었다.
그녀의 시선이 등을 스치고, 내 안에서 뭔가 하나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알람 소리가 들렸다.
“삐— 삐—.”
빨간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수번호 382, 반복 종료. 갱생 단계 확인.”
눈을 뜨자, 새하얀 방이었다.
모니터 속에는 내가 보였다.
수없이 반복되는 나날들, 폭력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의 ‘죄송합니다.’
모니터 앞의 교도관이 말했다.
“382번, 사회 복귀 승인.”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나가며 속삭였다.
“오늘은, 진짜 오늘이네.”
- Chapter 2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