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분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일하다가요.”
“돈도 좋지만, 평생 후회합니다.”
“.......”
한 때, ‘쓰리 잡’을 뛴 적이 있다. 밀린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일단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였다. 먼저 돈을 벌고 나서 학교에 다시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중고차 판매장에서 다마스 한 대를 구매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연료비는 동급 최강인 자동차이다. LPG를 주 연료로 하는데, 당시 2만 원만 넣으면 85%까지 충전이 되었다. 그때부터 다마스는 '나의 애마'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각종 생활정보지를 검색하여 일자리를 구했다. 어차피 학교를 자퇴했으니 나한테 남는 것은 시간이었다.
‘24시간 풀로 뛰는 아르바이트라도 좋다.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다오.’
마음속으로 잔뜩 벼르고 있는데,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건어물 매장 관리직원 모집,
10시~16시, 월급 120만 원’
저녁에 학원 강사를 하고 있던 터라 오전에 잠깐 일하면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9시 ‘땡’ 하자마자 이력서를 들고 건어물 사무실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방금 전화한 사람인데요.”
“아~벌써 오셨어요? 하하하, 구인광고 내고 첫 전화입니다.”
건어물 가게 사장님도 매우 유쾌한 기분이 들었나 보다. 출근하자마자 바로 한걸음에 내달렸으니. 그만큼 그 당시 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운전도 하시고, 별문제 없으시면 바로 일 시작하시죠.”
사장님은 내 이력서는 읽지도 않은 채,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하였다. 냉동 창고에 가득한 건어물을 분류하여 두 대의 차에 싣는 일이 주 업무였다. 단순 노동이지만, 얼음이 가득한 냉동 창고를 드나들고, 높은 천장까지 사다리를 타고 물건을 적재하는 일이라서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대학을 자퇴하고 ‘건어물 창고지기’를 한다고 말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과연 뭐라고 말할 것인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오전에 물건을 적재하고 차량에 싣고 나면, 조금 한가해진다. 12시 30분부터 14시까지는 꿀 같은 휴식 시간이다. 창고 한편에 라면 한 상자와 냉장고에 김치와 밑반찬을 넣어두었다. 배고프면 언제든지 꺼내먹으라는 사장님의 배려인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끓이고 냉장고에서 신 김치를 꺼내왔다.
‘파송송 계란탁!’
첫눈이 내리는 창가, 그리고 그 옆에 놓은 오래된 사무실 책상. 밑에는 생활정보지를 깔고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눈으로만 봐도 시큼한 묵은지와 하얀 쌀밥 한 그릇.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나트륨 때문에 라면을 꺼린다는데, 나에게 라면은 보약과도 같은 존재였다. 허겁지겁 국물까지 ‘원샷 드링킹’을 하고 먹는 일회용 ‘맥심 커피’의 참 맛. 제아무리 ‘블루마운틴, 르왁커피’가 세계적인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나는 커피 맛을 모른다. 내 입에는 맥심 커피가 최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예전과 똑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하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팅’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는 것 같더니, 좀처럼 허리가 구부정한 상태로 안 펴지는 것이었다.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가 된 것이다.
허리부터 온갖 척추를 억누르는 고통이 수없이 밀려왔다. 병원에라도 가려면 그래도 택시를 타러 밖에 나가야 하는데 정말 큰일 난 것이다. 너무 아파서 서러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 아프면 안 되는데, 일 나가야 하는데.’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면서,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갔다. 재활의학과 담당 선생님은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하다 다쳤어요? 아니면 막노동하셨어요?”
“둘 다 아니고, 잠 한숨도 안 자고
‘쓰리잡’ 뛰었어요.”
“네? 아이참, 젊은 친구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다 평생 못 일어나요.”
“평생요?”
그동안 쌓였던 온갖 서러움이 밀려왔다. 24시간 중에 단 2시간만 자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결국 나에게 돌아온 것은 ‘그러다가 평생 못 일어난다.’라는 경고였다.
그때 예전에 읽었던 빌 게이츠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이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이 말에 공감했다. 모든 사람의 조건과 환경이 자로 잰 듯이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로봇이 아닌 이상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빌 게이츠의 말대로 익숙해지면 된다. 불평할 필요도 없다. 불평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익숙해지는 순간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다. 맛있는 라면을 먹고 열심히 일하고 꿈을 꾸고 다시 일어서는 매우 지루한 게임을 하는 것, 그것이 목표를 이루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욱 안정적인 노동 환경에서 고임금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 사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장 2명 직원 1명의 건어물 가게이지만,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제품이 있다. 지금도 외우고 있는 그 이름도 찬란한 제품명은 다음과 같다.
‘버터 오징어 구이, 반건조 오징어, 문어발, 대왕 문어 머리, 오징어 촉수 튀김, 오징어 입 볶음, 한치 양념구이, 오다리, 오다리 카레 맛, 오다리 매운맛, 작은 꽃게 튀김….
이들 안주를 원활하게 납품해서 얻는 보람은 무엇일까. 딱 봐도 맥주 안줏거리다. 내가 분류해서 가장 신선한 제품으로 납품 송장을 써서 식당에 보내면 몇 시간 후 예쁘게 포장되어 ‘아무거나 안주 12,000원’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맥주 한 잔에 푸는 직장인들의 쓴 입을 달래주는 ‘고소함’ 담당을 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다. 이 얼마나 흥분되는 업무인가.
물론 특이한 시각을 가졌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상하다고 ‘돌려 말하는 그분’들도 위에서 나열한 오징어류를 한 번 이상은 맛보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안 먹어 본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세요. 그렇다면 이번 게임은 1:1 무승부다.
대도시에서 넥타이를 매고, 멋있게 출근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재 주어진 현실이 그와는 상관없이 다른 그림이라면, 자신의 일상에 ‘자신만의 가치 점수’를 높이 매기면 된다. 굳이 자존감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술 취한 고객의 음주운전을 예방해주는 대리기사님, 숙취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어묵 국물을 만드는 길거리 포장마차 사장님, 잠 못 드는 밤 가상현실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피시방 사장님, 답답한 내 속의 주체 못 할 영감을 한 곡조의 음악으로 풀어내도록 도와주는 노래방 사장님…….
잘 생각해보면 이분들이야말로 진정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눔의 리더'다. 누가 그들에게 ‘직업의 귀천’을 말할 것인가. 오히려 그분들이 노력하는 만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따라서 나는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분들이 노력한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는 시스템, 즉 '남을 살리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다.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떤 이는 아마도 입이 간질간질할 것이다. 사업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개그 작가이자 방송인 유병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걱정거리를
통장에 넣어두고 싶다.
거기는 뭐 넣기만 하면
다 없어지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