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로운 Sep 23. 2021

장모님의 생일선물

"아빠, 오늘부터 엄마 생겼다?!"

금년 추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추석과 함께 남편의 생일이 맞물려 있어서 1년 중 가장 큰 이벤트가 있는 주간이기도 합니다.


남편은 생일이 추석 다다음날이어서 생일이면 먹거리는 넘쳐났지만 생일을 위한 준비가 아닌 추석에 먹고 남은 음식을 나누는 생일이어서 생일에 대한 좋은 추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생일이 시아버님과 같은 날이라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남편의 생일은 늘 묻혀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추석보다 남편의 생일을 더 귀하게 챙겨주고 싶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저는 생일이 [어버이날]입니다. 기억하기 좋으라고 어버이날 낳으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지만 저는 제 생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 날짜를 선택하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생일이 없는지라 생일의 의미가 무색하기만 합니다.



저에게 생일은 늘 외롭고 쓸쓸한 날이었습니다. 생일이 어버이날이라서 생일인데 생일이 아닌,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없는 그런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일에 도리어 부모님 챙기느라 너무나 분주하고 바쁘게 보내야 했고, 결혼 이후에는 양쪽 어른 챙겨드려야 해서 더 바빴습니다. 어릴 때도 생일 케이크를 두고 촛불을 켜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요? 아버지에 묻혀 생일이어도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남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학창 시절, 매해 5월이면 정기적으로 부모님의 지방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춘계세미나가 열리는 기간은 5월 첫 주 4박 5일! 세미나 주간에 생일이 끼어 있어서 생일이면 거의 빈 집에 홀로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가시기 전 용돈을 챙겨주시기도 하셨지만 홀로 빈 집에서 맞이하는 생일은 쓸쓸했습니다.


'어버이날'이 생일이라서 친구들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다른 날은 늦게 들어가도 '어버이날'은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전 생일 전이나 후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덕분에 생일은 오롯이 빈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죠. 지금은 스마트한 세상이라 혼자 있어도 영상통화로 가족들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그때는 전화기가 없는 집도 있었고, 지방 산속에는 공중전화 없는 곳도 많았으니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5월 8일은, 저에게 특별한 날이지만 좀 쓸쓸한 그런 날입니다.



지난 5월 친정어머니께서 생일을 챙기라며 상품권을 통 크게 5장을 주셨습니다. 그러시며,


"결혼하고 변변히 옷 한번, 가방한 번 사는 것을 못 봤네. 이거 아끼지 말고 옷을 사든, 가방을 사든, 신발을 사든 꼭 유명 브랜드로 사거라. 또 생활비로 장 보는데 쓰지 말고 꼭 네 것을 사렴."


딸이 짠한 엄마의 마음이시겠죠. 자식이 부모가 되어도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반백년 가까이 살았어도 팔순이 가까운 노모의 눈에는 아직도 어리고 보살핌이 필요한 자식일 뿐이니까요. 어머니의 마음씀에 콧등이 시려옵니다.


사는 게 퍽퍽한 건 아닙니다. (어릴 때야 부모님도 자리 잡느라 그 시절 제 또래는 대부분 조금 쪼들려가며 살았으니까요.) 스무 살 이후부터 스스로 벌어서 썼고, 벌이가 넉넉하든 않든 사고 싶은 걸 못 살만큼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에 관심이 덜 가고 필요를 못 느껴서 안 샀던 것도 있고, 사실 브랜드를 잘 모릅니다. 가끔 직원들이 와서 자랑을 해도 알아보지 못해서 핀잔을 듣곤 했었지만 관심이 없다 보니 못 알아챕니다. 몰라서 그런지 보이는 것에 위축되지도 않는 듯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일하며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다가, 지금은 전업이 되었지만 아직도 늦둥이 아들을 키우고 있으니 정신없이 세월이 흘러갑니다. 외출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반경에서 움직이니 폼 나는 옷을 입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쩌다 가끔씩 결혼식이라도 갈라치면 좀 신경이 쓰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어쩌다 있을 행사에 맞춰 옷을 장만하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형도 많이 변했고, 변하고 있고, 어찌 더 변할지 알 수 없는데 하루 이벤트에 폼 한번 잡자고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을 옷을 사느데 쓰기는 좀 망설여졌습니다. 생활비로 쓰지 말라하셔서 아직 그냥 갖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둘이 데이트 삼아 쇼핑을 하게 되면 어머니 것 하나, 제 것 하나 나눠 사는 게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께 추석 연휴에 하고 싶으신 것을 여쭈었습니다.


"추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바람을 꿰고 싶은데 멀리 가면 동글이가 멀미를 하니 안 되겠고 송도는 어떠니?"

"송도요?"

"도시가 예쁘다던데 한 번도 안 가봐서 송도에 가보고 싶어. 가서 사진도 찍고 바람도 꿰고 오면 어때?"

"멀지도 않은데 다녀오면 되죠. 아침에 모이러 갈게요."


올해 76세이신 어머니는 사진동호회와 영상 만들기 동아리를 운영하는 카페지기십니다. 오빠 내외가 해외로 이민을 나가고 아들바라기 어머니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으셨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배우시며 아들 없는 빈자리를 채워드리려고 복지관 컴퓨터교실을 권해드렸습니다. 컴퓨터를 배우시더니 신세계를 맞은 기분이라며 좋아하셨고 벌써 컴퓨터 동영상 만들기 12년 차 베테랑이 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잘 만드셔서 생일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함께 찍은 사진이 영상파일로 변신해서 되돌아옵니다.


어머니의 지인들 중 사업을 하는 친구들께 의뢰를 받아 영상작업을 해 주기도 하십니다. 최근 친구분이 인수한 캠핑장에 방문하여 찍은 사진으로 홍보영상을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하셨습니다. 우연히 방송국 PD님의 레이다에 어머니께서 만드신 인상적인 영상이 걸려 촬영장으로 정기 계약을 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셨고 앞으로 평생 캠핑장 무료 사용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자랑하시는 어머니의 어깨가 하늘로 승천하게 될까 염려스러울 정도였죠.


날씨도 좋고 하늘도 예쁜 요즘, 바람을 쒜러 전국을 다니시며 찍은 사진들로 영상을 만들어 카페에 올려야 하는데 코로나로 발이 묶여 답답해하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바람대로 한적한 오전 시간을 빌어 송도로 향했습니다. 수도권에는 차들이 비교적 여유로워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동글이와 다섯 식구의 번개 나들이는 밀리는 차에 시달리지 않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한옥호텔 옆 식당에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들어서는데 어머니께서 슬그머니 다가오시더니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주십니다. 귓속말로


"사위 주거라. 생일선물이야."


반으로 접힌 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주며 비밀스레 전해주시는 것은 혹 안 받을까 염려하신 어머니 마음을 전하고자 하심이겠지요. '집에 가서 전해주자' 싶어 가방에 넣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뒤편에 정원도 예쁘고, 건너편에 펼쳐진 센트럴파크의 호수도 아름답습니다. 부모님의 다정한 사진도 몇 컷 찍어드렸습니다. 부모님의 밝은 웃음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네요. 자주 시간을 내어 함께하면 좋으련만 부모님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에 왜 이리 인색한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좋아하시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을 주셨을 때 늦었다 생각 말고 자주 뵈야겠습니다.


투명하게 맑은 하늘과 행복한 가족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하늘의 색은 너무 맑고 깨끗했어요. 밤부터 오전까지 내리던 비가 개이니 구름도 많고 깨끗해진 하늘이 너무나 예쁩니다. 빗물에 씻긴 나무와 꽃들도 목욕을 깨끗이 해서 색이 선명하고 예뻤습니다. 아무리 예쁜 색을 입혀도 자연만 못한 것 같습니다.


곳곳에 핀 예쁜 꽃과 나무


오전에 출발해서 도착하니 붐비기 전이라 한적하니 좋습니다. 센트럴파크 호수에서 바라본 건물들은 참 멋져 보입니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호숫가에서 사진 찍기에 진심인 어머니는 시간 가는 줄 모르십니다. 몇 해 전 인공관절 수술을 한 후, 텃밭 농사로 계속 몸을 쓰니 다리도 많이 아파하셨는데, 불편한 다리가 어디 있으랴 싶게 잘도 움직이십니다. 조금 더디지만 사진 찍기에 바쁘신 어머니의 카메라에는 송도 센트럴파크 호수가 가득 담겨 갑니다.


센트럴파크 호수공원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봉투를 전해주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너무 많은 용돈이 들어있었어요. 어머니께서 마음을 담아도 너무 많이 담아 넣으셨네요. 감사한 마음과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
지난주 어머니께서 사위 옷 한 벌 사주신다며 들르셨습니다. 함께 아웃렛에 갔는데 지난번 둘이 갔을 때 봤던 옷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이내 돌아섰습니다. 맘에 드는 옷의 가격이 만만찮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어머니께서 가자하시니 같이 갔지만 끝내 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장모님,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1년 고추 농사지으셔서 버신 돈으로 50만 원짜리 옷을 어떻게 사요. 같이 와주시고 마음 나눠주신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어머니, 감사해요."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뉴코아라도 가세. 뭐든 사주려고 나왔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사고 가나? 아니면 김포 아웃렛에 가든지..."
"아니에요. 집에 옷 많이 있어요. 있는 거 입어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사주시겠다는 어머니를 만류하고 돌아서서 함께 식사하고 모셔다 드리는 것으로 그날을 보냈는데 어머니 마음은 내내 불편하셨던가 봅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어요.


"응. 잘 도착했어?"

"네. 지금 막 도착해서 전화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용돈을 왜 이리 많이 넣으셨어요?"

"지난주에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을 사주려고 같이 간 거였는데 부담될까 봐 못 고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짠하더라. 엄마가 주는 용돈이니 사고 싶은 거 아끼지 말고 맘껏 사라고 전해주렴."

"사고 싶은 것 사기에도 너무 많은 돈이죠.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살면서 제 생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 엄마가 있는데 뭣이 걱정이니? 앞으로는 내가 챙겨준다고 걱정하지 말고 맘껏 사라고 하렴."

"봉투를 보고 또 보고 그러더라고요. 자기 생일이라고 누가 용돈준 적이 처음이라 이상하데요. 오늘 너무 마음이 들떠있으니 저더러 잔소리도 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그래. 오늘은 맘껏 좋아하라고 너도 잔소리하지 말으렴. 얼마나 신이 나면 그러겠니? 신나고 좋아하니 그걸로 됐다. 쉬어라~"


어머니의 통 큰 선물 덕분에 남편의 기분은 날아갑니다. 늘 윗사람 노릇하느라 챙기기에 바쁘게 살다가 챙김을 받는 느낌이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용돈 많이 받아서 좋아요?"

"좋지. 그런데 용돈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장모님께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게 좋아."

"엄마는 항상 당신이 소중했었어요."

"알아. 그런데 오늘은 진짜 자식이 된 것 같았어."


반백년이 되어도 소년 같은 설렘을 표정 가득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을 모르고 살았네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온전히 하루를 챙김 받아 본 경험이 처음이라며 한껏 들떠있는 남편에게 '엄마가 되어주겠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딸아이에게


"앵글아~ 아빠 오늘부터 엄마 생겼다?!"


오늘 동행을 안 했던 앵글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지만 엄마가 생긴 그 마음을 저라고 다 헤아릴까요.


자식이 한껏 들뜨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도 부모임을 새삼 느껴봅니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가장 소중한 진리 하나는 자식이 아무리 자기 잘난 듯 살아도 부모 마음 한 줌 헤아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부모님의 따뜻한 마음으로 훈훈해진 나들이였습니다.




훈훈한 부모님의 사랑으로 한 뼘 성장한 로운입니다.










이전 04화 듣기만 해도 울컥하는 이름... '아버지'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더니...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